‘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드의 AI 시리즈]
① AI 학습 데이터들에 권리와 가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⑤ + ⑥ AI로 인해 상대뿐만 아니라 내 진입장벽도 사라졌다

요즘 AI 스타트업 씬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어떤 서비스가 반짝 화제가 되면 일주일도 안 돼서 비슷한 기능을 가진 서비스가 서너 개씩 튀어나온다. UI만 조금 다르고 로직도, 톤도, 심지어 온보딩 문구까지 어딘가 낯익다. 예전 같으면 저거 특허 냈을 텐데 저래도 되나 싶을 상황인데, 요즘은 아무도 그런 걱정을 안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특허나 저작권으로 저 흐름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 기시감에는 이유가 있다. 예전엔 서비스 하나 만들려면 개발팀을 꾸리고, 최소 몇 달은 갈아 넣어야 프로토타입이라도 나왔다. 그 오래 걸리고 돈 드는 과정이 역설적으로 필터 역할을 해줬다. 이게 정말 필요한 서비스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애초에 시작조차 못 하는 구조였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AI가 코드를 대신 짜주니 아이디어만 있으면 주말 사이에도 MVP가 나온다. 그 필터가 사라지고 나니, 일단 만들고 보자는 흐름이 됐다. 저것도 되네, 그럼 이것도 되겠네 하면서 비슷한 카테고리에 우르르 뛰어드는 팀이 동시다발로 생긴다. 진입 자체가 쉬워졌다는 건 분명 좋은 소식인데, 문제는 그 쉬움이 나한테만 주어진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원래 진입장벽은 뭘로 쌓았나
사업에서 진입장벽이라는 건 결국 남들이 쉽게 못 따라오게 만드는 무언가다.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가서 아무나 못 뛰어들거나, 규제나 라이선스처럼 허가 자체가 관문이거나, 오래 쌓인 브랜드와 신뢰라 하루아침에 못 베끼거나, 아니면 데이터와 네트워크 효과처럼 먼저 커진 쪽이 계속 유리해지는 구조거나. 그런데 소프트웨어 기반 스타트업들이 오랫동안 기대온 방식은 따로 있었다. 기술 자체를 특허나 저작권으로 걸어 잠그는 것. 내가 먼저 만들었고, 그걸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 남들이 함부로 못 베낀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가 잘 작동하려면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내가 만들었다는 게 명확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AI가 개발 과정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바로 이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패가 원래부터 좀 헐거웠다
특허와 저작권은 원래 내가 먼저 만들었으니 함부로 베끼지 마라는 진입장벽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 방패가 AI로 뭔가를 만드는 순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일단 특허는 발명자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고하다. AI를 발명자로 올린 출원은 세계적으로 거절되는 추세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AI를 도구로 써서 발명한 것 자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이 발명자로 이름을 올리고 AI는 도구였다는 게 분명하면 출원은 가능하다.
문제는 저작권 쪽인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건 결국 사람이 창작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관여했는가다. 개발자가 구조를 잡고 AI가 초안을 뽑아준 걸 사람이 다시 고치고 붙였다면 창작적 기여가 인정될 여지가 있지만, 프롬프트 하나 던지고 나온 걸 그대로 쓰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한국저작권위원회가 AI 이미지를 단순 합성·보정만 한 결과물에 대해 인간의 창작적 기여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등록을 거절한 사례도 있다. 그림도 이런데 코드는 더하다.
코드는 억울하다
그림은 그나마 낫다. 스케치가 남고, 수정한 레이어가 남고, 붓터치의 흔적이라도 보인다. 코드는 그런 게 없다. 최종적으로 돌아가는 결과물만 남는다. 어느 함수를 사람이 직접 설계했고 어느 블록을 AI가 통째로 뱉어냈는지, 겉으로는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니 심사하는 입장에서도 이건 사람이 실질적으로 관여한 창작물이라는 걸 판단하기가 그림보다 훨씬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남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커밋 이력, 설계 문서, AI가 짠 코드를 사람이 왜 고쳤고 어디를 거부했는지 같은 흔적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벽이 등장한다. 등록이라는 건 결국 특정 시점의 스냅샷을 찍는 일이라, 그 버전의 저작권은 지켜지지만 AI가 다음 날 코드를 갈아엎으면 그건 이미 다른 얘기가 된다.
일부만 고쳤으면 기존 저작물의 개정판 정도로 새로 등록하면 되지만, 아예 원본과의 연속성이 끊길 정도로 새로 짜여지면 그건 법적으로 완전히 별개의 저작물이 되어버린다. 등록해놓은 v1.0은 그 자체로 남아있지만, 지금 실제로 서비스되고 있는 v3.7이 그 v1.0과 같은 보호를 받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스타트업이 하루에도 몇 번씩 코드를 뒤엎는 속도를 생각하면, 이 갭을 성실히 메꿀 여력이 있는 팀이 대체 몇이나 될까 싶다.
그리고 이 흔적을 남기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복잡한 아키텍처를 설계하거나 여러 기능이 얽힌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잡는 건 여전히 AI가 버거워하는 영역이다. 그러다 보니 전사 구성원이 저마다 필요한 기능을 AI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코드가 쌓이고, 정작 코어가 흔들려서 장애가 나면 누가 무슨 의도로 그 부분을 만들었는지 추적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일이 된다. 내가 짠 코드가 아니니까 원인을 찾는 것도, 창작적 기여를 입증하는 것도 둘 다 똑같이 막막해진다. 짓는 건 빨라졌는데, 고치는 것도 지키는 것도 둘 다 더 어려워진 셈이다.
그러니 다들 비슷한 걸 만들 수밖에 없다
AI로 무언가를 만드는 속도는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빨라졌는데, 그 결과물을 법적으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예전보다 좁아졌다. 발명자는 사람이어야 하고, 창작적 기여는 입증해야 하고, 그 입증조차 버전이 바뀌는 순간 다시 원점이다. 진입장벽을 쌓기가 이렇게 애매해지면, 결국 남는 전략은 하나다. 일단 빨리 만들고 본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특허로 지키기 전에 이미 열 팀이 비슷한 걸 만들고 있고, 차별화 포인트라고 내세우던 기능도 몇 주 안에 경쟁사 업데이트 노트에 똑같이 올라온다. 게다가 필터 없이 쏟아지는 건 꼭 필요한 서비스만이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서비스보다,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정도의 솔루션들이 훨씬 많이 섞여 나온다. 선택지는 넘치는데 그중에 진짜 필요한 걸 고르는 일 자체가 새로운 피로가 됐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능으로 차별화가 안 되면 남는 건 결국 가격과 마케팅비 싸움이다.
다들 비슷한 걸 팔고 있으니 고객 입장에서는 뭘 골라도 큰 차이가 없고, 그러면 조금이라도 싸거나 조금이라도 눈에 더 띄는 쪽으로 몰린다. 그러니 팀마다 광고비를 더 태우고, 가격을 더 낮추고, 무료 체험 기간을 더 늘린다. 시장 전체 파이는 그대로인데 나눠 먹는 입만 늘어나니, 한 팀이 조금 이기면 다른 팀이 그만큼 잃는 제로섬 게임이 된다. 예전 같으면 기술로 번 마진을 지금은 광고비와 할인으로 다시 게워내고 있는 셈이다. 기술 장벽이 사라진 자리를 자본력 싸움이 대신 채우고 있는 거고, 이건 결국 체력이 더 센 쪽이 오래 버티는 소모전으로 흐른다.
그래서 무엇으로 버티는가
특허가 예전만큼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건 뭘까. 이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보통 데이터, 브랜드, 네트워크 효과 같은 답을 먼저 떠올린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 이전에 더 근본적인 게 하나 있다. 같은 기술을 손에 쥐고도 그걸 실제로 굴리는 조직의 속도와 판단력이다. 코드는 복제할 수 있어도, 그 코드를 왜 이 방향으로 짰고 다음엔 뭘 고칠지 판단하는 팀의 감각까지는 복제가 안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은 결국 더 현실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서비스들로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입장벽이 약한 시장에서는 고객이 지갑을 잘 안 연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쓰는 서비스에 돈을 안 내도, 조금만 기다리면 비슷한 걸 무료로 풀거나 더 싸게 내놓는 곳이 또 나올 거라는 걸 고객도 은연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재는 넘치고, 마음만 먹으면 직접 만들어도 되는 세상이니 굳이 지금 결제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이 서비스만의 이유가 없으면 고객은 기다린다.
그러면 사업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하나 남는다. 제품의 아이디어나 기술력, 독창성으로 승부를 보려던 계획이 생각처럼 안 먹히면, 결국 자본으로 진입장벽을 다시 쌓는 쪽으로 흘러간다. 남들보다 오래 적자를 버틸 수 있는 체력, 공격적으로 가격을 낮추고 마케팅비를 쏟아부어서 남들이 못 따라오게 만드는 대규모 자본 플레이 말이다. 기술이 지켜주지 못하는 자리를, 결국 돈이 얼마나 많으냐가 대신 지켜주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건, AI가 진입장벽을 낮춰서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정작 끝까지 살아남는 건 가장 창의적인 팀이 아니라 가장 자본이 두꺼운 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들기는 민주화됐는데, 그게 오히려 돈 벌기를 더 어렵게 만드는 셈이다.
기술로 문을 걸어 잠그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면,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문을 못 잠그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걸 지킬 체력이 없는 팀은, 애초에 이 경쟁에 뛰어들 자격이 있는 걸까.
해당 콘텐츠는 이드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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