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빨리 탈출해야 할까요?
요즘 멘티 분들께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슬픈 말이기도 한데요,
“저, 디자인 계속해도 될까요?”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이야기가 비슷합니다. 어느 회사 대표가 주말 이틀 동안 AI로 한 달짜리 일을 끝냈다더라, 프로덕트 팀이 통째로 정리됐다더라. 스레드에서도 단톡방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돕니다. 끝에는 늘 같은 말이 붙고요. 디자인, 빨리 탈출하라고.
시안은 하루, 합의는 2주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제가 걸리는 건 그런 일이 벌어지는 스테이지입니다. 대개 이제 막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고, 만드는 건 아직 세상에 없는 제품의 첫 화면이나 랜딩 페이지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첫 화면을 뽑아내는 일이라면 AI가 빠릅니다. 대표가 주말에 직접 해도 되는 게 맞고요.

한국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뽑는 회사를 떠올려 보면 풍경이 다릅니다. 금융 앱이든 커머스든 이미 유저가 존재해 ‘개선’하는 서비스가 많습니다. 제가 디자인 리더와 PO로 일하는 동안 화면 그리는 속도 때문에 일정이 밀린 적은 드물었습니다.
밀리는 이유는 늘 다른 데 있었거든요. 이 기능을 넣으면 기존 결제 흐름이 깨지는지, 법무 검토는 끝났는지, 지난 실험에서 전환율이 왜 떨어졌는지, 옆 팀이 같은 자리에 배너를 걸겠다는데 누구 말을 들을지. 시안은 하루면 나오는데 합의에 2주가 걸렸죠. AI가 그 하루를 한 시간으로 줄여 줘도 2주는 크게 변하지 않을지 몰라요..
면접에서 묻는 것들
디자인이 왜 필요한지 매번 설명하고 방어해야 해서 지친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채용할 때 면접에서 확인하던 게 바로 그 능력이었으니까요. 이 결정을 왜 했는지, 어떤 숫자를 보고 판단했는지, 반대하는 개발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입 아픈 부수 업무처럼 여겨지는 그 일이 한국 인하우스에서는 직무의 절반을 넘습니다.
장바구니의 쿠폰 영역을 고치는 일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 둘이 사흘 동안 시안 여섯 개를 그렸죠. 지금은 한 명이 오전에 AI로 서른 개를 뽑아 옵니다. 서른 개 중 어느 둘을 실험에 올릴지, 개발 공수가 큰 안을 왜 밀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사람이 회의실에서 정하고요. 판단하고 설득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시안을 그리던 두 번째 디자이너의 사흘이 사라졌습니다.
해고는 없고 공고가 사라집니다
그 사흘이 어디로 가는지가 문제입니다. 한국은 사람을 쉽게 내보내지 못하는 나라라서 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드뭅니다. 회사는 나간 자리를 채우지 않고 신입 공고를 올리지 않는 쪽을 택하죠.
디자이너 다섯 명이 하던 일을 세 명이 하게 되는데 그 세 명은 자리를 지키거든요. 들어오지 못하는 건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죠. 디자인이라는 일은 남고 디자이너라는 자리는 줄어듭니다. 이 변화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현직 5년 차의 책상보다 졸업을 앞둔 취준생의 지원서일 겁니다.

화면을 만드는 일로만 자기 역할을 정의해 온 사람도 같은 자리에 섭니다. 와이어프레임까지 그려진 기획서가 내려오면 피그마로 옮겨 상태별 화면을 채우는 방식은 에이전시와 SI에서 흔합니다. 포트폴리오를 열어 보면 리뉴얼 전후 화면이 나란히 있고 왜 그렇게 바꿨는지는 클라이언트 요청으로 끝나죠.
발주처 담당자가 AI로 시안을 직접 받아 보기 시작하면 이 역할부터 견적서에서 빠집니다. 한국은 이 층이 두껍거든요. 팀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요란한 뉴스는 없어도 영향을 받는 사람 수는 적지 않을 겁니다.
경계가 공평하게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디자인할 수 있다”는 말은 뒤집어 읽을 수도 있습니다. 개발자가 AI로 화면을 만든다면 디자이너도 같은 도구로 구현을 하고 기획서를 쓰겠죠. 제가 디자이너에서 PO로 넘어갈 때는 숫자 하나를 확인하려 해도 분석 담당자에게 쿼리를 부탁하고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을 보려면 개발자의 시간을 빌려야 했고요. 지금은 쿼리를 AI와 같이 짜서 직접 뽑고 실제로 동작하는 화면을 혼자 만들어 사용자 앞에 가져갑니다. 그때 넘어야 했던 담 가운데 상당수가 없어진 셈이죠.

좁은 문, 지나가는 사람들
신입에게는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아직 없습니다. 공고는 줄고 다들 경력직만 찾는데 그 경력을 어디서 쌓으라는 건지, 이 막막함을 저도 코칭 자리에서 자주 듣습니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데 그 말은 못 하겠더라고요. 문이 좁아진 건 사실이니까요.
대신 요즘 제가 본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AI로 작은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배포한 분들이 있거든요. 사용자라고 해 봐야 몇십 명인데, 그 몇십 명이 어느 화면에서 나가는지 들여다보고 가설을 세워 고친 다음 다시 숫자를 확인한 기록을 포트폴리오에 담아 오죠. 읽다 보면 제가 3년 차 때 회사에서 하던 일보다 낫다 싶은 대목이 많습니다. 경력자도 포트폴리오에 담기 어려워하는 경험을 회사 밖에서 먼저 해 본 겁니다.

연차가 더는 나를 방어해 주지 않습니다. 5년 차에게도 불편한 말이고 11년 차인 저한테도 마찬가지죠. 이제 시작하시는 분들에게는 같은 문장이 조금 다르게 읽혔으면 합니다. 회사에 들어가야만 쌓을 수 있던 경험을 이제는 혼자서도 쌓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문은 좁아졌습니다. 하지만 통과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분 통과자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디자인이란 장르를 정말 좋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이 작은 힌트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우디 (우디디자인랩)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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