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90와 마그마에서 미래 자동차 브랜드의 생존 전략을 생각한다
얼마 전 하남 스타필드에 갔다가 제네시스 매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매장 한가운데 붉게 타오르는 자동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차체는 바닥에 낮게 붙어 있었고, 전면의 선명한 마그마 오렌지는 후면으로 갈수록 짙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GMR-001 하이퍼카였다. GMR-001 하이퍼카 디자인 모델은 GMR 팀의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 경주용 차량을 실제 크기로 구현한 모델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제네시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처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네시스 하면 떠오르던 것은 ‘현대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정숙함’과 ‘안락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네시스와 ‘레이싱’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고성능 트림 하나를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그마’라는 별도의 고성능 영역을 만들고, 레이싱팀을 꾸리고, 세계적인 내구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그 차를 바라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러다 내 머릿속에 몇 가지 키워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전기차’·’AI’·’다크 팩토리’·’자율주행’.
서로 전혀 다른 기술처럼 보인다. 전기차는 동력원의 변화이고, AI는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다크 팩토리는 생산방식의 변화이며 자율주행은 자동차를 사용하는 방식의 변화다.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네 가지 변화는 결국 한 곳을 향한다.
자동차를 잘 만든다는 말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는 것. 전기차는 자동차의 기술구조를 바꾸고 있다. AI와 로봇은 생산구조를 바꾸려 한다. 자율주행은 자동차의 사용방식 자체를 바꾼다. 그리고 이 변화가 충분히 진행된다면 언젠가 자동차 회사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질문이 남을 수 있다.
자동차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도 자동차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GMR-001을 바라보며 어쩌면 제네시스가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자동차도 언젠가는 PC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전기차 시대가 본격화되면 자동차 산업의 구조가 어느 정도 PC 산업과 닮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자동차가 PC처럼 된다는 말은 누구나 부품을 사다가 집에서 자동차를 조립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동차는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제품이다. 충돌 안전과 내구성, 각국의 인증, 품질보증과 리콜, 정비망까지 갖춰야 한다.
그럼에도 PC 산업의 변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다. 기술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기술이 존재하는 위치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컴퓨터는 ‘완제품 회사가 만드는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삼성이나 삼보 같은 브랜드 PC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PC의 구조가 표준화되면서 산업이 달라졌다. CPU는 인텔이나 AMD가 만들고, 메인보드는 ASUS나 기가바이트가 만들고, 메모리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만들었다.
그래픽카드와 SSD, 파워서플라이에도 각각의 전문기업이 생겨났다. 소비자는 이 부품들을 조합해 자신이 원하는 PC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것은 CPU나 GPU 기술이 쉬워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 기술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달라진 것은 완제품 회사 하나가 모든 핵심기술을 직접 개발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기술이 전문기업으로 분화됐고, 완제품 기업의 경쟁력은 점차 ‘모든 것을 직접 만드는 능력’에서 ‘최고의 기술을 골라 하나의 제품으로 통합하는 능력’으로 이동했다. 전기차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보인다. 내연기관 시대에는 엔진과 변속기가 완성차 업체의 핵심 기술 자산이었다. 좋은 엔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년 동안 연소와 내구성, 진동과 소음, 냉각과 제어기술을 축적해야 했다. 그래서 BMW의 직렬 6기통 엔진이나 포르쉐의 수평대향 엔진처럼 엔진 자체가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기차에서는 경쟁의 구성이 달라진다. 배터리, 모터, 인버터, 전력반도체, 열관리 시스템, 그리고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진다. 이 기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전문기업들이 고도화하고 있다. 물론 좋은 전기차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배터리 안전과 충돌 안전, 차체 강성, 열관리, 서스펜션과 제동, NVH, 소프트웨어 안정성, 사이버보안까지 수많은 요소를 하나의 자동차 안에서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 그래서 완성차 회사의 기술력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오히려 역할이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내연기관 시대의 중요한 능력이 핵심기술을 직접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면, 전기차 시대에는 점점 수많은 기술을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완성차 기업이 거대한 시스템 통합자(System Integrator)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 하나를 본다. 기술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질 수 있다는 것. 좋은 기술은 경쟁자가 따라올 수 있다. 좋은 부품은 다른 기업도 구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기업은 그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내느냐로 경쟁해야 한다.
여기에 AI와 로봇이 더해진다면
기술의 구조가 바뀌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를 만드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자동차 공장은 이미 가장 자동화가 많이 진행된 제조현장 가운데 하나다. 용접과 도장, 부품 운반과 일부 조립공정에는 오래전부터 산업용 로봇이 사용돼왔다. 하지만 AI가 결합되면 자동화의 성격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 자동화가 사람이 미리 정해놓은 작업을 정확하게 반복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공장은 상황을 판단하고 생산방식을 스스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AI가 시장수요를 예측하고, 생산 일정을 조정하고, 설비의 이상을 사전에 감지한다. 자율이동로봇이 부품을 운반하고, 로봇이 조립하며, 비전 AI가 품질을 검사한다. 디지털트윈에서는 실제 공장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생산방식을 시험한다.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본격적으로 투입된다면 지금까지 사람이 해야 했던 복잡한 작업의 일부도 자동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사람을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자동차 산업을 지탱해온 ‘규모의 경제’라는 공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자동차 회사가 되려면 거대한 생산시설이 필요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수천 명의 노동자와 수많은 협력업체를 연결한 뒤, 수십만 대를 일정한 품질로 생산할 수 있어야 했다. 자동차를 설계할 줄 안다고 자동차 회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만 대를 안정적으로 찍어낼 수 있는 제조능력 자체가 거대한 진입장벽이었다. 하지만 AI와 로봇이 생산설비를 더욱 유연하게 만든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여러 모델을 만들고, 수요 변화에 따라 생산량을 빠르게 조정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생산거점에서도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는 방식이 지금보다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이른바 마이크로 팩토리가 주목받는 이유다. 물론 거대한 자동차 공장이 곧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프레스와 도장, 배터리팩, 공급망, 인증, 품질과 리콜을 생각하면 자동차 산업은 여전히 무거운 산업이다.
다만 질문은 가능하다.
‘대규모 자동차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도 지금만큼 절대적인 경쟁력이 될까.
전기차가 기술의 장벽을 일부 바꾼다면, AI와 로봇은 제조의 장벽까지 조금씩 바꿀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 회사가 지켜야 할 경쟁력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자율주행은 이 변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전기차가 자동차의 동력원을 바꾼다면, 자율주행은 자동차의 의미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지금 자동차는 개인이 직접 소유하고 사용하는 기계다. 내가 사고, 내가 운전하고, 내가 주차하고, 내가 관리한다. 그래서 자동차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취향이 들어간다. 어떤 차를 타느냐는 때로 경제력과 라이프스타일, 취향과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기호가 되기도 한다. 메르세데스-벤츠, BMW, 포르쉐, 페라리, 롤스로이스. 이 이름들은 단순히 이동수단의 이름이 아니다. 각각 어떤 삶과 취향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완전자율주행이 충분히 고도화되면 이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 앱에서 목적지를 입력한다. 자동차가 나를 데리러 온다. 탑승하면 알아서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자동차들은 도로상황과 교통정보를 공유하며 최적의 경로를 찾는다. 이 단계가 되면 자동차는 ‘내가 운전해야 하는 기계’에서 이동을 제공하는 단말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가 버스를 탈 때 그 버스에 어떤 엔진이 들어갔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중요한 것은 달리는 감각이 아닐 수 있다. 얼마나 안전한가. 얼마나 정확한가. 얼마나 편안한가. 그리고 이동하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자동차의 가치는 ‘운전하는 기계’에서 ‘움직이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차 안에서 일을 하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자동차가 ‘제품’에서 ‘서비스’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 자동차를 한 번 판매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차량을 배차하는가, 누가 데이터를 관리하는가, 누가 충전과 정비를 최적화하는가, 누가 결제와 보험을 담당하는가, 누가 자동차 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동차 회사의 경쟁자 역시 자동차 회사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AI 기업, 반도체 기업, 클라우드 기업, 지도와 데이터 기업, 모빌리티 플랫폼 기업까지 자동차 산업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미래 자동차 기업은 자동차만 만드는 제조업체로 남아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프트웨어 기업이어야 하고, 서비스 기업이어야 하고, 이동하는 공간을 설계하는 기업이어야 하며, 하나의 생태계를 운영하는 기업이어야 한다.
이동이 서비스가 되면 소유는 욕망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자동차가 이동수단으로서 완벽해질수록 자동차를 소유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깨끗하고 안전한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를 데리러 온다면 굳이 수천만 원을 들여 자동차를 살 필요가 있을까’
보험료와 세금을 내고,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정비를 하고, 감가상각까지 감수해야 할 필요가 줄어든다. 특히 도시에서는 ‘자동차 소유’와 ‘이동’이 점점 분리될 수 있다. 이동 기능만 놓고 보면 필요한 순간 필요한 자동차를 호출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래 자동차 시장은 두 방향으로 나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필요의 자동차다. 안전하고,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면 된다. 자율주행 로보택시와 공유형 모빌리티가 여기에 속한다. 이 시장에서 자동차의 브랜드는 지금보다 덜 중요해질 수 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탈 때 차량 제조사의 브랜드보다 서비스의 품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전혀 다른 시장이 남는다. 욕망의 자동차다. 없어도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지만 갖고 싶은 차. 이동만이 목적이라면 더 저렴하고 편리한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내 돈을 내고 소유하고 싶은 차다. 여기서 자동차의 구매 이유는 기능을 넘어선다. 디자인이 좋아서, 직접 운전하고 싶어서, 그 브랜드를 좋아해서, 내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그 차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에 산다.
이때 자동차 회사가 답해야 할 질문도 바뀐다.
“이 자동차가 왜 더 좋은가”가 아니라 “왜 굳이 이 자동차를 갖고 싶은가.”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능력과 갖고 싶은 자동차를 만드는 능력은 전혀 다르다. 좋은 자동차는 기술과 품질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갖고 싶은 자동차는 기술만으로 만들기 어렵다. 역사와 디자인, 문화와 희소성, 상징과 이야기, 그리고 그 브랜드를 선택하는 사람이 느끼는 정체성까지 필요하다.
스마트워치 시대에도 롤렉스는 살아남았다
나는 여기서 지금의 기계식 시계 시장을 떠올리게 된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기계식 시계를 살 이유는 이제 거의 없다. 스마트폰만 있어도 충분하다. 사실 손목에 차는 기기가 필요하다면 스마트워치가 훨씬 많은 일을 해준다.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하고, 일정을 관리하고,심박수와 운동량을 측정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기능만 놓고 보면 스마트워치가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롤렉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파텍필립도, 오데마 피게도 사라지지 않았다.

‘왜일까’
사람들이 그 시계에서 더 이상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사고, 희소성을 사고, 장인정신과 디자인을 사고, 그 브랜드를 손목에 올린다는 의미를 산다. 기계식 시계는 기능을 잃으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능에서 해방되면서 상징이 됐다.
자동차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자동차의 이동 기능이 서비스로 보편화될수록 개인이 직접 소유하는 자동차는 오히려 더 감성적인 제품이 될 수 있다. 기능이 평준화될수록 기능 바깥의 가치가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제네시스의 마그마와 GV90가 만난다.
마그마 레이싱은 제네시스에게 없었던 ‘과거’를 만든다
마그마는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에는 유독 역사가 중요하다.
페라리에게는 레이싱의 역사가 있다. 포르쉐에게는 르망을 비롯한 수많은 모터스포츠의 기억이 있다. 애스턴마틴 역시 오랜 스포츠카와 모터스포츠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 회사들의 고성능 자동차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빠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자동차 뒤에 수십 년의 시간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승리가 있었고, 실패가 있었고, 전설적인 드라이버와 자동차가 있었고, 그 장면을 기억하는 팬들이 있다.
그래서 페라리나 포르쉐를 산다는 것은 단순히 높은 출력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 브랜드가 오랜 시간 쌓아온 기억까지 함께 구입하는 것이다. 바로 헤리티지다. 그리고 제네시스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이것이다. 제네시스는 젊은 브랜드다. 디자인은 빠르게 인정받았다. 상품성도 높아졌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모터스포츠의 역사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 1950년대의 르망 기록을 지금 새로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지금부터 미래의 과거를 만드는 것. 나는 Genesis Magma Racing과 GMR-001을 바로 그런 시도로 본다. 레이스에서 실패하고, 완주하고, 경쟁하고, 언젠가 포디엄에 오르고, 또 언젠가는 우승할 수도 있다. 그 장면들이 쌓이면 결국 역사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단순한 한 시즌의 기록이 20년, 30년 뒤에는 “제네시스가 처음 세계 내구 레이스에 뛰어들던 시절”이라는 브랜드의 기억이 될 수 있다. 마치 1970년대 현대차의 포니가 수십 년이 흐른 뒤 한국 자동차 산업의 출발을 상징하는 헤리티지로 다시 소환되고, 콘셉트카와 모터쇼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브랜드의 과거는 결국 현재에서 만들어진다. 오늘 하남 스타필드에 놓여 있던 GMR-001이 언젠가 제네시스 박물관 한가운데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터스포츠는 제네시스가 시간을 단숨에 압축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시간을 축적하기 시작하는 장소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마그마가 만들어야 하는 욕망도 명확하다.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데도, 나는 이 차를 직접 운전하고 싶다.”
속도, 코너링, 기계와 사람이 연결되는 감각. 운전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시대가 온다면 직접 운전하는 행위는 오히려 더 귀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마그마를 욕망을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GV90는 제네시스에게 없었던 ‘상징’을 만들려고 한다
마그마가 제네시스에게 헤리티지를 만드는 프로젝트라면, GV90는 제네시스에게 아이콘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럭셔리 자동차 시장에서는 기술적 우수성만으로 최고급 브랜드가 될 수 없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 롤스로이스, 레인지로버, G클래스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이름들은 각각 이미 뚜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마이바흐에는 최고급 의전과 뒷좌석의 이미지가 있다. 레인지로버에는 영국식 럭셔리와 SUV의 전통이 있다. 롤스로이스에는 최상위 럭셔리와 맞춤 제작의 이미지가 있다. G클래스 역시 흥미롭다. 오늘날 G바겐을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극한의 오프로드를 달리기 위해 그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 G클래스가 가진 박스형 디자인, 오랜 역사, 강인함, 희소성,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다는 사회적 이미지까지 함께 구입하기 때문이다.
기능이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럭셔리 자동차가 일반 자동차와 갈라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 자동차의 질문이 “이 자동차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면, 럭셔리 자동차의 질문은 어느 순간 “이 자동차를 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바뀐다.
제네시스에는 이미 좋은 자동차가 많다. 하지만 제네시스라는 이름이 마이바흐나 롤스로이스, 레인지로버처럼 특정한 사회적 이미지를 즉각 떠올리게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이것은 품질의 문제라기보다 시간과 상징의 문제다.

나는 GV90가 바로 이 벽에 도전하는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GV90의 의미가 단순히 ‘제네시스에서 가장 크고 비싼 SUV’라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이미 시장에는 더 크고 더 비싼 SUV가 많다. 중요한 것은 GV90가 제네시스만의 럭셔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그래서 ‘한국적 럭셔리’와 ‘환대’라는 언어가 중요해진다. 제네시스가 마이바흐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레인지로버가 영국식 럭셔리를 가지고 있고, G클래스가 강인함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면, 제네시스 역시 자기만의 문법을 만들어야 한다. 여백, 절제, 공간, 환대. 언젠가 사람들이 GV90를 바라보며 “저것이 제네시스가 생각하는 럭셔리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부터 GV90는 단순한 대형 전기 SUV가 아니라 하나의 아이콘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 마그마와 GV90는 그래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곳을 향한다.
마그마는 묻는다.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데도 이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고 싶지 않은가.”
GV90는 묻는다.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데도 이 차를 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하나는 운전에 대한 욕망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와 정체성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제네시스는 현대차그룹에 더 중요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대차그룹 안에서 제네시스가 맡는 역할도 달라 보인다. 현대차와 기아가 대중시장과 규모, 생산성과 전동화를 담당한다면 제네시스는 한 단계 다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높은 가치를 받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있는가.”
럭셔리 브랜드의 힘은 단순히 가격을 비싸게 붙이는 데 있지 않다. 소비자가 그 가격을 납득하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그 제품을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 바로 가격 결정력(Pricing Power)이다. 비슷한 크기의 SUV라도 어떤 브랜드에는 5천만원을 지불하고, 어떤 브랜드에는 1억원을, 또 어떤 브랜드에는 몇 억원을 지불한다. 그 차이를 제조원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 디자인, 서비스, 희소성, 사회적 상징, 브랜드에 대한 감정이 가격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제네시스가 진정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된다는 것은 현대차그룹이 단순히 ‘좋은 자동차를 잘 만드는 회사’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자동차에 더 높은 가치를 붙일 수 있는 회사가 되는 것. ‘가격 대비 좋은 차’에서, ‘가격을 넘어 갖고 싶은 차’로 이동하는 것이다.

한국 제조업은 ‘잘 만드는 나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현대차그룹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한국 제조업 전체가 앞으로 풀어야 할 질문과 연결된다. 한국은 오랫동안 잘 만드는 나라였다. 자동차, 반도체, 조선, 배터리. 높은 품질과 생산성, 빠른 실행력과 원가 경쟁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기술과 제조 노하우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에는 ‘잘 만든다’는 것만으로 영원히 차이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잘 만든 제품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붙일 수 있는가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가방을 만들지만 루이비통을 판다. 스위스는 시계를 만들지만 롤렉스를 판다. 독일은 자동차를 만들지만 포르쉐를 판다. 이탈리아는 자동차를 만들지만 페라리를 판다.
그 가격에는 원재료와 제조원가만 들어 있지 않다.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디자인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상징이 있고, 사람들의 욕망이 들어 있다. 그래서 제네시스의 도전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도 꽤 상징적이다.

마그마는 한국 자동차 브랜드가 세계적인 모터스포츠 안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GV90는 ‘한국적 럭셔리’라는 개념이 세계 소비자에게 실제로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여백과 절제, 공간과 환대 같은 한국적인 언어를 자동차라는 산업제품 안에 넣고 그것을 글로벌 럭셔리의 문법으로 바꿀 수 있는가’다.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로. 기술을 수출하는 나라에서, 기술 위에 문화와 상징까지 얹어 수출하는 나라로. 어쩌면 그것이 한국 제조업이 넘어야 할 다음 문턱인지도 모른다.
다시 하남 스타필드 불타는 듯한 주황색 자동차 앞에서
하남 스타필드 제네시스 매장 한가운데 놓여 있던 GMR-001. 처음에는 그저 멋진 레이싱카라고 생각했다.
‘제네시스가 레이싱 자동차도 만드는구나.’
그 정도였다. 그런데 전기차와 AI, 로봇과 자율주행, 그리고 GV90까지 함께 놓고 생각하고 나니 그 자동차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자동차 산업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단순히 엔진이 사라지고 배터리가 들어가는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이 바뀌고, 자동차를 생산하는 방식이 바뀌고, 자동차를 사용하는 방식이 바뀌며, 궁극적으로는 자동차를 소유해야 하는 이유까지 달라지는 변화다.
그 끝에서 자동차 회사에는 결국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굳이 당신의 자동차를 갖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제네시스가 지금 두 가지 답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그마는 제네시스가 미래에 자랑할 과거를 만들기 시작한다. GV90는 사람들이 미래에 선망할 상징을 만들려고 한다. 하나는 헤리티지를 쌓고, 다른 하나는 아이콘을 만든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쌓인다면 언젠가 제네시스도 설명이 필요 없는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페라리처럼. 포르쉐처럼. 마이바흐처럼. 레인지로버처럼. G바겐처럼. 이들 브랜드에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좋은 자동차’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브랜드 이름을 듣는 순간 이미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속도, 럭셔리, 성공, 모험, 장인정신, 혹은 특정한 삶의 방식. 브랜드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국 사람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지금 당장 살 수 없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타보고 싶은 차. 성공한다면 꼭 한번 가져보고 싶은 차. 기능을 넘어 사람들의 드림카가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인지도 모른다. 제네시스 역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바로 그곳일 것이다.
‘현대차가 만든 고급차’라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브랜드.
‘가격 대비 상품성이 좋은 프리미엄 자동차’라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브랜드.
제네시스라는 이름만으로 어떤 이미지와 감정이 떠오르는 브랜드.
그 지점에 도달한다면 제네시스는 더 이상 기존 럭셔리 브랜드를 추격하는 브랜드가 아니다. 자기만의 기준과 세계를 가진 브랜드가 된다. 그리고 처음의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도 여기에서 찾게 된다.
‘왜 하필 지금 제네시스는 레이싱을 시작하고, 동시에 GV90 같은 플래그십을 준비하는가’
자동차가 점점 더 완벽한 이동수단이 되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자동차 회사가 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은 기술 바깥에 남는다. 더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굳이 그 자동차를 갖고 싶은 이유를 만드는 것.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에도,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그래도 나는 저 차를 갖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어쩌면 미래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값비싼 기술은 배터리도, AI도, 자율주행도 아닐 수 있다.
그 모든 기술이 보편화된 뒤에도 끝까지 남는 것.
사람들의 욕망을 만드는 능력.
그것이 제네시스가 지금 자동차와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인지도 모른다.

광화문덕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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