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 중국 IT 칼럼니스트가 미디엄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마윈(马云). 사람들은 그를 ‘알리바바 그룹’의 리더로 기억합니다. 그의 자서전을 읽어본 사람들은 차이나옐로우페이지(中国黄页)의 창업자,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항저우사범대 출신 영어 교사까지 논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마윈의 아내인 ‘장잉’은 알리바바 창업 멤버이자, 한 때는 알리바바그룹의 중국내 사업부를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급격하게 커지고 나서는 일선에서 손을 떼고 마윈을 내조하게 됩니다. 일과 가정을 놓고 마윈과 말다툼을 했단 소문도 있지만, 여튼 알리바바의 업무를 내려놓게 되죠.

 

이제는 장잉에 대해 ‘알리바바 창업을 함께 한 내조의 여왕’이란 평가가 종종 붙긴 하지만, 주로 마윈의 연설에서 ‘결혼관’ ’가족관’을 설명할 때 언급되는 정도랄까요.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이야기죠.

실제 최근 중국에서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한 강연에서 했다는 말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제목은 ‘어머니보다 아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 “엄마와 아내 중 누구를 구할래?” 남자의 선택은…(SBS)

장잉의 멘트가 언론에 공개될 때면 ‘마윈의 아내’ 정도로 표현이 될 뿐입니다. 가령, “나는 마윈을 알리바바에 빼앗겼다’’와 같이 말이죠.

과연 이게 전부일까요?

장잉이란 인물을 찾아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얼마 전 중국 출장길에 올랐을 때, 비행기 안에서 할 일이 없어 ‘이것이 바로 마윈이다(这就是马云)’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마윈이 항저우전자공업학원 영어 교사였던 시절 그의 제자이자 후에 알리바바그룹 비서실에서 일하게 되는 천웨이가 쓴 자서전입니다.

이 책은 마윈이 교사 시절부터 알리바바를 세우기까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듯한 묘사로 채워져 있는데요. 저의 눈길을 끄는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마윈을 향한 현명한 내조(马云的贤内助)란 부분이었습니다. 짧은 챕터이지만 장잉의 면면이 잘 담겨있어서 본문을 인용, 의역했습니다.

ps. 책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에서 구매하시면 됩니다. 참, 중문입니다. 《这就是马云》(陈伟)【摘要 书评 试读】- 京东图书

마윈의 아내인 장잉은 항저우사범대학교 동기였다. 후에는 항저우전자공업학원의 같은 학과 연구실에서 교사의 일을 했다.

항저우전자공업학원 재직시절 장잉과 마윈

장잉이 어학반에 있던 시기, 만약 마윈이 일이 있어 수업을 하지 못할 경우 대신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업 횟수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각도에서 봤을 때 장잉은 마윈보다 나은 점이 많았다. 마윈이 수업을 할 때는 (영어보다는) 사상 방면에서의 내용이 많았으며,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장잉의 수업은 영어의 챕터를 종합하는 내용으로 구성됐으며, 그는 열심히 어법과 어휘를 가르쳤다. 마윈보다 전문적이었고, 영어 외의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마윈과 장잉의 집은 당시 항저우의 가장 서편에 있었다. 쭉 서쪽으로 가면 농지가 나오고 그곳에 그들의 집이 있었는데, 밤마다 개구리의 소리가 들렸다.

마윈은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이로 인해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장잉은 학생들을 미소띈 얼굴로 차와 함께 맞이했다. 어떤 때에는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간 뒤 어지러진 것을 치우는 건 장잉의 몫이었다.

영어교사 시절의 마윈

장잉은 영어 수업을 하는 동시에, 마윈의 창업을 도왔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기기로 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농촌의 보모를 구했는데, 그 결과 아이들의 말투가 농촌 출신의 보모가 쓰는 발음을 닮게 됐다. 가령 전지를 ‘띠엔츠(电池)’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이를 ‘띠엔요우(电油)’라 말하는 식이었다. 아이들의 발음은 점점 표준어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장잉은 보모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윈이 ‘차이나옐로우페이지(中国黄页)’를 창업하던 시기 집을 저당할 계획을 한 적이 있다. 한 학생이 모임에 참여했을 때 마윈이 이 일을 언급했는데, 장잉은 마윈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무력하게 말하기를 “꼭 방을 저당잡아야겠어요? 그 이후에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요?”라고 하기도 했다.

차이나옐로우페이지가 설립된 후 마윈은 미국 출장을 여러차례 다녔는데, 처음에는 매우 흥분했으나 후에는 매우 피곤해서 본인 대신 장잉을 가게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윈이 나에게 전화하기를 “천웨이(나), 학생들의 모임을 하나 조직해줘, 오늘부터 매일 밤 활동하게 될 거야”라고 했다. 내가 묻기를 “마 선생님 지금 시간이 비나요?”라 했더니, 마윈은 “지금 미국에는 장잉이 있어, 무려 15일 동안! 마치 거지가 200만 위안을 주운 느낌이야, 어떻게 이 돈(시간)을 소비해야할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장잉은 마윈의 창업 초기에 단지 현명하게 내조한 것을 넘어, 창업 핵심 멤버의 역할도 했다. 기억하기로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첫 수입인 8000위안 역시 장잉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허나, (알리바바) 창업이 성공한 이후에는 장잉이 할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2008년 장잉이 알리바바 사무실에 방문해 부총재를 찾을 때가 있었는데, 이 부총재는 장잉이 직접 키웠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회사 앞 안내데스크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장잉을 막아서더니 “아가씨, 누구를 찾으러 오셨나요?”라고 묻더라. 장잉은 “저는….”이라고 말을 꺼내면서 자신의 자녀뻘 되는 직원을 바라본 뒤 무얼 말해야 할지를 잊어버렸다.

그후 장잉은 알리바바에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언젠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말하기를 “저 스스로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회사인데, 이제는 그곳에 가지 않게 됐어요. 거기에서 제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거든요”라고 했다.

알리바바에 나가지 않은 뒤로는 마윈을 내조하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장잉이 알고 있는 마윈은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외부 손님과 대화를 할 때만 하더라도 지칠줄을 몰라 하며 매우 흥분하는 모습이었고, 그 사람이 떠난 후에야 피로를 느꼈다. 콘퍼런스가 밤늦게 열릴 때면 장잉은 타임키퍼 역할을 하면서 마윈이 일찍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윈은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곤 했는데, 점심 시간이 될 때면 장잉은 음식을 잘 먹고 있는지 채근했다. 점심 시간 사무실에 가면 종종 다음과 같은 마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고기는 두점 먹었고, 달걀은 반개 먹었어, 야채는 많이 먹었고….과일은 지금 먹고 있어!”

마윈이 입는 옷은 모두 장잉이 준비한 것이다. 장잉이 사는 옷은 곧 마윈이 입어야 한다는 의미다. 홍콩에 있었을 때 마윈은 스스로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는데, 실상 본인이 옷을 고르긴 했으나, 본인이 주도권을 갖지는 못했다.

아이의 엄마이자, 맞벌이 교사이자, 창업가의 아내로 살아온 장잉,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의 알리바바를 만든 개국공신이랄까요.

그래서인지 마윈은 강연을 할 때마다 종종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는데, 그의 아내인 장잉이 준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알리바바에는 여성 직원 비중이 46%를 차지합니다. 한때는 49~50%였는데, 최근 인수한 회사들의 남자 직원들이 많더군요(웃음). 전세계 IT 회사 중 가장 높은 비중의 여직원이 알리바바에 있습니다. 우리의 계열사엔 여성 CEO, CFO, COO도 있습니다. 저는 여성이야말로 알리바바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남성이 갖지 못한 ‘이타심’을 갖고 있습니다. 스스로보다 가정을, 스스로보다 남편, 자녀를 생각하죠. 그들의 포용력이 점점 중요한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의역).”

[유재석의 중국 이모저모] 이야기

유료 콘텐츠 시대의 도래  2부
– 중국 IT 발전 촉매제는 불편함이다?

– 중국은 1인 미디어가 대세다..전문성+뉴미디어 생태계가 만든 거대 시너지
– 중국에서 미디어 커머스가 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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