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의 문화예술계를 지배한 살롱이 때아닌 2020년에 대한민국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독서모임 트레바리, 취향을 공유하는 문토,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넷플릭스 살롱 등 서울 시내 수많은 소위 핫한 거리마다 살롱이 하나씩은 존재한다. 

 

 

살롱문화의 시작

   

우리 부모님 세대, 아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인서울의 괜찮은 대학을 나오면 먹고 살 길이 있었다. 특히 10학번이나 그보다 조금 위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문대학의 학과라 할지라도 취업철이 되면 과사에 각 기업의 지원서가 즐비해있고 어딘가는 붙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설과도 같이 흐를 뿐이다. 우리의 사회는 안정적인 출세 코스라고 여겨졌던 명문대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의 신화가 이미 깨져버린 다음의 사회니까. 그리고 어떤 성취지위(귀속지위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한두 개가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은 애석하게도 자기 자신밖에 없게 되었다. 가정도, 직장도 아닌 온전히 내밀한 나의 가치만이 영속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살롱은 바로 이 사회적인 것의 붕괴 이후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기 시작한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이는 살롱이 날 때부터 소속된 제1의 공간도, 사회의 일원이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속된 제2의 공간도 아닌 온전한 자의로 고르는 제3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살롱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가장 편안한 자신의 상태일 수 있게 해주는 취미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이다. 편안한 상태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뜨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도시에서의 비인격적인 만남과 더불어 우리가 필연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한 연대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기준을 토대로 유기적으로 협업하고 성장하는 ‘느슨한 연대’가 제3의 공간으로서 살롱이 성장하게 된 배경이다. 

 

 

소셜 디스커버리의 본질

 

살롱은 연대를 형성하고 싶은 인간의 사회성을 충족시키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결국 소셜 디스커버리(영어로는 social search)이다. 틴더로 인해 그 뜻이 조금 달라졌지만,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게 해주는 업이 소셜 디스커버리업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서비스가 매력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양가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서의 양가성은 인간 존재의 상충적인 욕구인 ‘코나투스’(존재의 증강 및 자기 보존에 대한 욕구)와 ‘인정욕구’을 뜻한다. ‘코나투스’는 존재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여 개성을 획득하고 오리지널리티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이와 반대로 ‘인정욕구’는 말 그대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욕구이다. 이 또한 자신의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고자 형성된 심리기재이다. 개성과 인정, 남과 다른 독창성에 대한 남의 인정. 소셜 디스커버리는 이를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먼저 ‘코나투스’는 ‘나’라는 존재의 복수성을 통해 충족된다. ‘나’는 내가 만나는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형성된다. 고로 가정에서의 ‘나’와 직장에서의 ‘나’는 다르고, 연인과 만날 때의 ‘나’와 친구와 만날 때의 ‘나’는 다르다. 고로 모르는 이들과의 색다른 소통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드러낸다. 프리즘이 스펙트럼을 형성하듯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나’가 등장하게 된다. 소셜 디스커버리 서비스는 새로운 자신의 발견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나아가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 심화시킬 수 있다며 코나투스를 충족시킨다. 

소셜 디스커버리 서비스의 ‘인정욕구’는 보다 직관적으로 충족된다. 다만, 스스로를 소셜 디스커버리 앱이라 정의 내리는 틴더와 살롱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만족시킨다. 틴더가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속성들을 바탕으로 한껏 꾸민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채운다면, 살롱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라는 욕구를 자극한다. 틴더도 살롱도 결국 스스로의 외견이든 내면이든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찾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물론 이때 외적이냐 내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두 자아 모두 어느 정도의 연출성을 띤다. 

 

 

소셜 디스커버리의 본질

= 코나투스 + 인정욕구의 충족

 

 

살롱의 본질은 취향인가?

   

 

필자가 임의로 만든 이 도식은 살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를 보여준다. 도식 상으로는 사람과 공간, 그리고 취미가 겹치는 교집합의 영역이 살롱이라고 되어있는데 왜 취미/취향은 빠지는가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살롱에서 취미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살롱이 취향과 취미, 그리고 기호를 토대로 소비자를 모집한다. 그렇지만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많은 이들이 취향과 취미가 없기 때문에 살롱에 매력을 느낀다는 뜻이다. 취미를 갖고 있는 이들은 이미 동호회 활동이나 각종 소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마땅한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와중에 확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에 대해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는 사람일 것이며 이들은 동호회나 소모임의 방식으로 취미를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개성 넘치는 삶을 갈망하며, 취미가 있고 스스로의 기호를 명확히 아는 삶을 선망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시도는 낯설고 두려운 영역이다. 살롱은 이 ‘낯설음'(맞춤법 상 표기는 낯섦이 맞다)에 파고든다. 살롱은 이 낯설음을 ‘리더’(혹은 호스트)의 존재와 나름의 규칙을 통해 해소한다. 이미 뚜렷하게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는(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리더가 개최한 수업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영역의 지식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고, 금전을 지불한 만큼 가르침을 요구하는데 부끄러울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 살롱을 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나아가 살롱은 나름의 규칙과 매너(이름도,직장도, 학력도, 그 어떤 것도 밝히지 않는 불문율), 그리고 높은 금전적인 문턱을 통해 모임에 대한 완벽한 통제와 안전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를 형성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한 심리적인 문턱을 낮춰주는 것이 살롱이 성공한 비결이다. 

“변화무쌍한 세상일수록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무엇에 깊이 매료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스스로를 더 잘 지키고 사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스스로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에게 취향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것이다.

살롱은 취향이라는 수단을 매개로 특정 사람들이 특정 공간에서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살롱의 본질은 사람과 공간에 있다. 스스로의 색채를 찾기를 희망하는 마음들이 향한 살롱에서 그들은 어떤 사회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상황(살롱 자체의 규칙과, 살롱이라는 공간에서 연출하고 싶은 자아의 모습이 있기는 하다)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앞서 개인의 복수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살롱 또한 매 시즌마다 누군지 모르는 눈앞의 사람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바로 이 낯선 사람들이 살롱에서 ‘코나투스’를 충족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취향 기반의 살롱이라면, 살롱의 액티비티를 스스로의 취미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키워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리더가 이끄는 취향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개개인의 개성을 개화하는 장으로서 기능한다면, 물리적인 공간은 어떤 공간이든 무관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에 이은 살롱의 또 하나의 본질은 바로 물리적인 공간에 있다. 살롱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특성은 소셜 디스커버리업의 또 다른 본질인 인정욕구를 충족시킨다. 살롱은 대개 뜨는 거리, 골목의 세련되게 꾸며진, 연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살롱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일반적으로 잘 꾸며진 단독주택이거나, 혹은 세련된 코워킹 스페이스의 모습을 띄고 있다. 제1의 공간인 가정과 제2의 공간인 일터의 이상적인 모습을 차용한 것이다. ‘이상적인’ 일상의 공간에서 그들은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이상적인 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살롱의 참가자들은 스스로가 이상적인 사회적 인간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살롱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사회의 일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밖에 없는 공간 연출인 것이다. 

결국 소셜 디스커버리라는 업의 본질을 구현해내는 살롱의 본질은 낯선 사람과 세련된 공간이다.

 

 

‘나와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들과 이상적인 공간에서의 대화’

 

 

이것이 살롱의 본질이다.

 

해당 콘텐츠는 가오리즈와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