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BI-INSIGHT] 세계 최대 필름마켓, 칸 마르셰 뒤 필름에 다녀왔습니다
매년 5월,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의 작은 도시 칸(Cannes)이 전 세계의 시선을 끌어모읍니다. 레드카펫과 팔메도르(Palme d’Or)로 상징되는 칸영화제는 누구나 알지만, 그 이면에서 동시에 열리는 또 다른 판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마르셰 뒤 필름(Marché du Film), 칸 필름마켓입니다.
영화제가 작품을 ‘선정’하고 ‘상영’하는 곳이라면, 마르셰 뒤 필름은 영화를 ‘사고파는’ 곳입니다. 레드카펫도, 시상식도 없습니다. 대신 협상 테이블이 있고, 계약서가 있고, 9일 동안 수천 건의 비즈니스 미팅이 쉼 없이 이어집니다.
2026년 마르셰 뒤 필름은 5월 12일부터 20일까지 열렸습니다. 140개국 이상에서 16,000명의 영화 전문가가 몰린 역대 최대 규모. 직접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마르셰 뒤 필름은 어떤 곳인가
마르셰 뒤 필름의 역사는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칸영화제가 열리는 같은 기간, 같은 장소에서 영화를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 규모의 필름마켓이 되었습니다.
규모만 봐도 압도적입니다. 올해 기준으로 140개국 이상에서 16,000명의 마켓 참가자, 1,700명의 바이어, 600개의 출품사, 1,500편의 스크리닝, 250개의 업계 이벤트. 숫자만 봐도 이곳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래 대상은 영화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드라마 시리즈, OTT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포맷까지 콘텐츠 산업 전반을 아우릅니다. 완성된 작품만 거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촬영이 진행 중이거나 기획 단계인 프로젝트도 테이블 위에 오릅니다.
다른 주요 필름마켓들과 비교하면 칸 마켓의 위치가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2월 베를린에서 열리는 EFM(유러피안 필름마켓)이 유럽 중심의 예술·독립영화에 특화되어 있고, 3월 홍콩의 필마트(FILMART)가 아시아 시장의 관문 역할을 한다면, 칸 마켓은 그 모든 스펙트럼을 한 번에 품는 자리입니다. 상업영화부터 독립영화, 아트하우스까지. 북미,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까지. 전 세계 콘텐츠 산업이 한 번에 집결하는 곳이 칸입니다.

팔레 데 페스티발, 거래의 중심
칸 마켓의 심장부는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입니다. 칸영화제의 레드카펫이 펼쳐지는 바로 그 건물 안에, 마켓 기간에는 수백 개의 부스가 빼곡히 들어섭니다.
각 세일즈사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콘텐츠의 포스터와 홍보물을 전시하고, 사전에 미팅을 신청한 관계자들을 맞이합니다. 거래 대상이 영화일 뿐, 가격을 묻고 정보를 파악하고 계약을 약속하는 전체 프로세스는 여느 비즈니스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팔레 외에도 칸 전역에 걸쳐 마켓이 펼쳐집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호텔들의 테라스와 로비가 비공식 미팅 공간이 되고, 크루아제트(La Croisette) 산책로를 걷다 보면 뱃지를 단 업계 관계자들이 서서 미팅을 이어가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칸이라는 도시 전체가 마켓의 무대가 되는 셈입니다.

마켓 기간 동안 1,500편 이상의 작품이 스크리닝됩니다. 뱃지를 소지하거나 사전에 컨택이 된 경우에만 입장이 가능하며, 관심이 집중된 작품은 좌석이 금방 마감되기도 합니다.
2026년 칸 마켓, 현장에서 읽은 3가지 흐름
1. 역대 최대 규모, 더 넓어진 연결의 장
올해 칸 마켓은 16,000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습니다. 140개국에서 모인 관계자들이 9일 동안 쉼 없이 연결되었습니다. 참가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콘텐츠가 더 많은 시장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출처: Variety, 2026.05.12
2. AI는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도구로
AI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논의의 방향입니다. “AI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해서 더 잘 만들 것인가”라는 실무적 접근으로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올해 마켓에서는 generative AI와 버추얼 프로덕션, 몰입형 경험 등 새로운 기술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집중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AI는 이제 위협이 아닌 도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출처: Marché du Film 공식 사이트
3. 아시아 콘텐츠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칸의 가장 눈에 띄는 흐름 중 하나는 아시아의 약진이었습니다. 2026 Country of Honour로 선정된 일본은 참가자 수가 전년 대비 50% 가까이 증가했고, 일본 IP 마켓(Japan IP Market)이 별도로 신설되었습니다.
한국 영화의 존재감도 어느 때보다 선명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장을 맡은 가운데,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영화제 내내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며 K-장르물의 저력을 함께 보여줬습니다.


EFM, 필마트, 그리고 칸 마켓 — 세 마켓을 함께 보다
세 곳을 직접 다니며 느낀 것은, 각 마켓이 단순히 규모만 다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2월 베를린의 EFM은 예술성과 비즈니스가 교차하는 분위기를 가집니다.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라는 역사적인 공간 안에서, 작가주의 영화와 유럽 독립영화를 찾는 관계자들이 모입니다. 계약의 무게가 느껴지는 조용하고 진지한 마켓입니다.
3월 홍콩의 필마트는 아시아 시장에 특화된 관문입니다. 빅토리아 하버가 내려다보이는 HKCEC에서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콘텐츠의 유통이 집중적으로 논의됩니다. 드라마, OTT, 포맷, 웹툰 IP까지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그리고 5월 칸 마켓은 그 모든 것의 교차점입니다. 스펙트럼이 가장 넓고, 참가자가 가장 많고, 거래 규모도 가장 큽니다. 동시에 업계의 트렌드를 가장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장르와 지역이 부상하고 있는지, 스트리머와 극장의 균형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 칸 마켓에서 9일을 보내면 그 흐름이 보입니다.
현장에서 느낀 것
마켓은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 크루아제트의 야자수, 레드카펫의 화려함과 달리, 마켓 내부는 철저히 비즈니스의 공간입니다.
좋은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에게 닿게 하는 것. 결국 마켓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제작자와 세일즈사, 각국의 관계자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고, 협상하고, 계약하는 이 과정이 없다면 각자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작품들은 국경을 넘기 어렵습니다.
OTT의 확산으로 콘텐츠 소비 방식은 크게 바뀌었지만, 이 마켓들의 역할은 오히려 커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콘텐츠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누가 먼저 좋은 콘텐츠를 발굴하고 계약하느냐의 싸움은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 싸움이 가장 뜨겁게 펼쳐지는 9일이 칸 마르셰 뒤 필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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