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금 독서를 ‘플레이’합니다
지난 글에서 책이 더 이상 조용히 읽히기만 하는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문장이 팝업스토어 안으로 들어오고, 작가와 독자가 북페어에서 직접 만나고, 친구와 메모를 주고받으며 책을 읽는 방식까지. 책은 종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감각과 관계의 영역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독서 문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읽었는지 기록하고, 인증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합니다. 러닝 앱에 운동 기록을 남기듯, 독서도 하나의 루틴이자 챌린지, 나아가 작은 게임처럼 소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 달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서의 게임화’입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조금 덜고, 대신 읽는 과정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방식. 지금 젊은 독자들은 독서를 그렇게 다시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 “책을 안 읽는 시대”라는 말 뒤에 숨은 다른 신호
먼저 숫자부터 보면, 이 흐름은 더 흥미로워집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로, 2023년 조사 대비 4.5%p 하락했습니다.[1] 성인 10명 중 6명가량은 1년 동안 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을 포함한 독서 경험이 없었던 셈입니다.
이 숫자만 보면 책 시장을 둘러싼 비관론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졌고, 독서는 점점 소수의 취미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20대 독서율은 오히려 74.5%에서 75.3%로 소폭 상승했습니다.[1] 전체 독서율은 내려가는데, 가장 젊은 독자층은 거꾸로 책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노년층(60세 이상)의 종합독서율이 14.4%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2] 세대 간 독서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합니다.
이 이상한 엇갈림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쩌면 책을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세대는 점점 멀어지고, 책을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자 ‘함께 즐기는 콘텐츠’로 받아들인 세대는 오히려 책 가까이 모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을 붙잡는 장치 중 하나가 바로 게임의 문법입니다.
# 독서를 러닝처럼: 기록되는 순간, 읽기는 계속됩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예스24가 올해 시작한 독서 캠페인 ‘2026 리딩런’입니다. 이 캠페인은 독서를 러닝 앱의 언어로 바꿔버렸습니다. 참여자는 예스24 앱의 타이머로 독서 시간을 기록하고, 10분을 1km로 환산해 자신의 독서 거리를 쌓아갑니다. 코스도 스타터(10km·100분), 하프(21km·210분), 마라톤(42km·420분)처럼 실제 러닝 개념을 그대로 빌려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디지털 뱃지를 받고, 독서 지원 상품권을 받을 수 있으며, 완주 인증서와 참여자 순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3]
사실 “책 좀 읽어야지”라는 다짐은 쉽게 흐려집니다. 하지만 “하프 코스 완주까지 38km 남았다”는 목표는 조금 다릅니다. 막연했던 독서가 숫자로 바뀌는 순간, 독자는 자신의 진척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리, 페이스, 뱃지, 순위, 인증서. 우리가 운동 앱에서 익숙하게 경험하던 장치들이 독서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기부 구조까지 더해집니다. 코스별 완주 횟수에 따라 기부금이 적립되면서, 개인의 독서 기록은 작은 사회적 가치로도 이어집니다.[3] 독자는 단순히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완독의 부담은 낮추고, 참여의 이유와 재미는 더한 셈입니다.
# 트레바리의 규칙: 독서는 의지가 아니라 구조로 완성됩니다
트레바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독서를 게임화합니다. 이곳의 핵심은 ‘읽고, 쓰고, 만나는’ 구조입니다. 모임에 참여하려면 책을 읽고 모임 전날까지 400자 이상의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며, 제출하지 않으면 해당 모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4]
겉으로 보면 꽤 높은 진입장벽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제약이 트레바리의 힘이기도 합니다. 돈을 냈다는 사실, 마감이 있다는 압박,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긴장감. 혼자였다면 미뤘을 독서를 끝내게 만드는 장치들이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2015년 네 개의 모임으로 출발한 트레바리가 지금까지 꾸준히 회원을 모아온 데에는,[5] 이 단단한 구조의 힘이 큽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교환 독서’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혼자 하는 독서는 쉽게 중단되지만, 누군가와의 약속이 생기면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트레바리는 이 원리를 커뮤니티 서비스의 구조로 끌어올렸습니다. 독서를 혼자만의 의지에 맡기지 않고, 약속과 마감과 동료의 시선 안에 배치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건 독서모임의 주제도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문학을 읽는 모임”이 아니라, 기획자의 태도를 단련하는 모임, 매달 한 권씩 운동하듯 읽는 모임, AI 시대의 몸과 감각을 탐구하는 북클럽까지 등장합니다.[4] 이제 독서모임은 책을 읽는 장소를 넘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메뉴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독자는 책 한 권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나의 몇 달간의 경험을 구매하고 있는 셈입니다.
# 함께 읽는 판을 까는 출판사들: 책은 이제 혼자 읽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은 대형 플랫폼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온라인 북클럽 ‘그믐’에서는 출판사가 직접 도서를 증정하며 함께 읽는 모임이 끊임없이 열리고,[6] 문학동네의 ‘독파’는 완독챌린지 형태로 독자들을 모읍니다.[7] 민음사 역시 독서모임 캘린더를 통해 전국의 독서모임 일정을 연결하고 있습니다.[8]
출판사들이 책을 판매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함께 읽을 수 있는 판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책을 사는 순간 경험이 끝났다면, 이제는 책을 산 뒤에도 읽는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읽기 시작했다는 인증, 오늘의 분량, 함께 읽는 사람들의 코멘트, 완주 후의 기록까지. 책은 점점 더 긴 호흡의 콘텐츠가 되고 있습니다.
# 굿즈와 챌린지 사이: 독서는 라이프스타일 콘텐츠가 됩니다
책을 둘러싼 굿즈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올해 초 화제가 된 예스24의 ‘문학 디퓨저 컬렉션’은 프랑스 향기 브랜드 발쇼(BALCHAUD)와 협업해, 고전 문학의 분위기와 서사를 향으로 확장한 사례입니다.[9] 위대한 개츠비, 월든,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의 정취를 다섯 가지 향에 담았는데요. 단순히 책 옆에 놓는 장식품이 아니라, 독서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사전 펀딩에서 목표액의 748%를 달성했다는 사실은,[10] 이런 ‘감각적 독서 경험’에 대한 수요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독서 챌린지, 친구와의 인증, 텍스트힙이라는 유행어가 함께 붙으면 책은 더 이상 조용히 읽는 물건만은 아니게 됩니다. 읽는 행위 전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콘텐츠가 됩니다. 독서가 텍스트를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공간의 무드와 취향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넓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경험의 상품화’는 이제 ‘경험의 게임화’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는 문장 한 줄을 소유하는 데서 나아가, 읽는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자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책을 다 읽었는지 여부만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지, 그 여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 경험을 누구와 나눴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 변화하는 독서 시장의 새로운 설계법
그렇다면 브랜드와 출판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할까요.
이제 독자에게 “이 책을 끝까지 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여정을 어떻게 더 즐거운 플레이로 만들 수 있을까.
먼저, 독서는 측정 가능해질 때 더 쉽게 지속됩니다. 시간, 거리, 페이지, 뱃지처럼 눈에 보이는 단위가 생기면 독자는 자신의 진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연한 결심보다 구체적인 숫자가 사람을 더 잘 움직입니다.
또 하나는 혼자가 아니게 만드는 일입니다. 마감, 약속, 동료, 인증은 독서를 지속하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입니다. 좋은 콘텐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함께 읽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독자는 혼자 읽을 때보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때 더 오래 머뭅니다.
마지막으로, 완독만을 보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까지 읽지 못했더라도 오늘의 한 문장을 남기고, 짧은 감상을 쓰고, 모임에 한 번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성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서가 부담스러운 숙제가 아니라, 가볍게 진입할 수 있는 플레이가 될 때 사람들은 다시 책 쪽으로 돌아옵니다.
책은 여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책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과 함께 기록하고, 인증하고, 연결되고, 플레이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더 좋은 책 한 권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책을 끝까지 즐기게 만드는 더 좋은 규칙, 더 가벼운 참여 방식,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독서의 경험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브랜드는 독자에게 어떤 플레이를 제안하고 있나요?
# 출처
[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 발표(2026.3.6). 성인 종합독서율 38.5%(2023년 대비 4.5%p 하락), 20대 75.3%(0.8%p 상승). https://www.korea.kr/briefing/pressReleaseView.do?newsId=156747582
[2] 뉴시안, “성인 독서율 38.5%로 하락… 그래도 책 읽는 20대 늘었다”(2026.3.6). 60세 이상 종합독서율 14.4%, 세대·소득별 독서 격차. https://www.newsia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894
[3] ZDNet Korea, “읽는 만큼 달린다… 예스24, 연간 독서 캠페인 ‘2026 리딩런’ 개최”(2026.4.28). 타이머 기록·10분당 1km 환산·스타터/하프/마라톤 코스·디지털 뱃지·완주 인증서·기부 적립 구조. https://zdnet.co.kr/view/?no=20260428103219
[4] 트레바리 공식 사이트. 모임 구성, ‘선 독후감 후 참여’ 제도 및 주제별 모임 안내. https://trevari.co.kr
[5] 플래텀, “독서모임 커뮤니티 ‘트레바리’ 투자 유치”. 2015년 9월 4개 모임으로 시작. https://platum.kr/archives/115962
[6] 온라인 북클럽 ‘그믐’. 출판사 협업 및 함께 읽기 모임. https://www.gmeum.com
[7] 문학동네 ‘독파’. 완독챌린지 플랫폼. https://dokpa.munhak.com
[8] 민음사 독서모임 캘린더. 전국 독서모임 일정 연결. https://minumsa.minumsa.com/bookclub/reading-party/
[9] 파이낸셜뉴스, “예스24, 문학 디퓨저 컬렉션… ‘문학, 향으로 맡는 시대’”(2025.3.17). 프랑스 향기 브랜드 발쇼(BALCHAUD) 협업, 향료 회사 로베르테(Robertet) 조향사 참여, 고전 문학 기반 5종 향. https://www.fnnews.com/news/202503170945338694
[10] 뉴스와이어, “예스24, 문학 디퓨저 컬렉션 론칭”(2025.3.17). 사전 펀딩 목표액 748% 달성.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1007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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