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자문/컨설팅 문의)
※ 이드의 HR 모험기 출간 소식

공고는 넘치는데 사람은 안 뽑히는 이상한 시장
요즘 HR 채용 공고를 보고 있으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시니어급, 리드급 공고가 유난히 많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주변의 시니어들은 다들 이직 자리를 못 찾아 헤매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공고는 넘치는데 사람은 못 구하고, 사람은 있는데 자리가 없다는 이 어긋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업계 지인들과 술 한잔 기울이다 보면 종종 나오는 말이 있다. 요즘 허리가 사라졌다는 거다. 실무자급이랑 리드급밖에 안 남았다는 얘기다. 연차나 경력만 놓고 보면 물론 중간층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런데 실제 역할로 들어가 보면 그 중간이 텅 비어 있다.
리드급 채용 공고들을 좀 뜯어보면 이 감각이 더 선명해진다. 분명 팀장급, 리더급을 뽑는다면서 요구 경력이 6년 이상, 심하면 4년 이상인 곳도 있다. 예전 대기업 기준으로 치면 이제 막 사원 딱지를 뗐거나 대리 초년차 정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리더급이라면 최소 10년, 시니어급이라 해도 8년은 봤었다. 짧은 시간에 기준이 왜 이렇게까지 흔들린 걸까. 이유를 하나씩 뜯어보면 생각보다 복합적이다.
조직이 쪼그라들면 자리도 같이 쪼그라든다
토스, 쿠팡, 야놀자, 직방 같은 이름들이 스타트업 씬을 이끌던 고성장기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리더 포지션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던 시기였다. C레벨도 많았고 디렉터, 헤드, 리드까지 조직 안에 다양한 리더 자리가 존재했다. 성장 속도가 빠르니 승진도 빠르고 역할 변화도 잦았다. 조직 안에서 몇 년만 버티면 자리가 저절로 열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저물고 정체기, 다운사이징이 찾아왔다. 500명 규모가 200명이 되고, 300명이 100명이 되고, 심지어 몇십 명 수준의 최소 인원 운영이 이제는 흔한 풍경이 됐다.
이걸 조금 게임처럼 단순화해서 그려보면 이렇다. 어떤 팀 하나를 유지하는 데 쓸 수 있는 총 포인트가 16이라고 치자. 리더 1명이 10포인트를 쓰고, 남은 6포인트는 주니어 실무자 3명이 각각 2포인트씩 나눠 쓴다. 회사가 계속 크면 이 총량도 20으로 늘어난다. 그러면 주니어 중 한 명이 시니어로 크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낼 수 있다. 리더 1명(10) + 시니어 1명(6) + 주니어 2명(각 2, 합 4) = 20. 숫자가 딱 맞아떨어진다.
문제는 성장이 멈췄을 때다. 총 포인트가 그대로 16에 묶여 있는데 주니어는 계속 크고 싶어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둘 중 하나다. 무리해서 포인트를 늘리거나, 그 사람을 내보내거나. 대부분은 후자를 택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리더 자리의 10포인트 중 상당 부분을 CEO나 경영진이 직접 가져가 버리고, 남은 리더 자리는 시니어에게 역할과 책임만 조금 얹어주는 방식으로 채우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름은 리더지만 예전 리더가 쥐던 권한과 예산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자리다. 그러다 보니 10년 차 이상의 진짜 시니어 리더들이 들어갈 자리는 점점 사라진다. 실무자로 가기엔 개발자처럼 명확한 기능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 연차대는 어중간하게 채용 시장에서 밀려나는 모양새가 됐다.
작은 회사들이 리더 타이틀을 남발하는 이유
재밌는 건 정반대 흐름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거다. 다운사이징된 만큼 작은 회사들의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 회사가 하나 생기면 어쨌든 인사 담당자가 필요하고, 보통 주니어 실무자 한 명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조직이 조금 커지면 사소한 의사결정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시니어라고만 부르기엔 애매하다. 시니어라는 이름으로는 그만한 책임과 권한을 주기가 어렵고, 결국 대표가 계속 직접 챙겨야 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주니어를 케어하는 것도 선배로서 하는 거지 리더로서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회사가 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나온다. 그냥 리더 타이틀을 주는 거다. 몇 년 차부터 리더라는 정해진 기준은 사실 없다. 조직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는 자리다. 실제로 한 스타트업은 시니어 포지션으로 채용 공고를 냈다가 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직함을 리더로 바꾸고 나서야 지원이 몰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했다. 후보자 입장에서도 시니어라는 이름보다 리더라는 이름에 더 무게감을 느끼는 걸 보면, 이름값이 실제 역할보다 앞서가는 시장이 된 셈이다. 채용공고 하나에 붙는 직함이 지원율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은 회사도 처음엔 몰랐을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흐름이 생긴다. 많은 작은 회사들에서 시니어 포지션 채용 니즈가 하나둘 리더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원래 허리층이었던 시니어들이 죄다 리더 타이틀을 갖게 된 셈이다. 이미 리더 명함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시니어 역할로 지원하는 걸 꺼린다. 그런데 정작 리더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위임받는 건 아니다. 예전 기준의 리더 권한은 여전히 대표나 경영진이 직접 쥐고 있다. 결국 대표의 실무 부담만 계속 무거워지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HR이 스스로 허리를 못 만든 이유
여기서 조금 자기반성이 섞인 얘기를 해보고 싶다. HR 리더로 일하는 나 스스로도, 지난 10여 년의 스타트업 부흥기 동안 HR이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이게 순전히 HR만의 잘못은 아니다. 회사와 대표의 몫도 분명히 있다.
회사가 커지고 시스템이 고도화되면, HR 리더는 정확히 뭘 해야 할까.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은 사실 상시로 붙어 있을 필요 없이 컨설팅으로도 얼마든지 해결된다. 진짜 필요한 건 전략적 의사결정이나 경영 전반에 HR 관점이 실제로 참고되고 관여되는 영역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그 영역이 스타트업 씬에서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기업이라면 이걸 인력계획이나 조직관리라는 큰 틀에서 운영한다. 그런데 스타트업은 애초에 그 정도 경영 체계를 갖추기 어렵다 보니, HR이 그 영역을 맡을 기회 자체가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인건비 관리는 주로 재무 관점에서만 다뤄진다. 숫자를 관리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과 역할을 설계하는 사람은 따로 없는 셈이다. 글로벌 확장 관련 관리는 확실히 필요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조직문화나 철학 영역도 있는데, HR이 다듬고 정리하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결국 오너십은 대표에게 있다. 대표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방향이 바뀌는 자리라, 사실상 HR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돌아보면 몇백 명, 몇천 명 규모가 안 되는 회사에서는 애초에 그런 HR 리더의 역할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도 채용 공고를 보면 대부분 핵심 인재 채용과 관리, 그리고 경영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데 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도 뜯어보면 좀 더 성숙하고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원하는 정도지, 10년 넘게 쌓아온 경험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영역인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리더급 타이틀로 입사했는데 업무의 대부분이 실무 채용으로 채워져 있더라는 얘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경험이 길어질수록 자리도 넓어져야 하는데,
그 둘이 나란히 가지 못한 채 조금씩 어긋나 온 셈이다.
트렌드는 너무 빨리 바뀌고, 대표는 자꾸 어려지고
스타트업 씬으로 한정해서 얘기하려 했는데, 요즘은 기존 기성 기업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있어서 좀 더 넓게 봐야 할 것 같다. 조직과 HR 관련 트렌드가 정말 숨 가쁘게 바뀐다. 목적 조직이라 불리던 기능 중심 구조가 유행하다가, 그다음엔 손익 중심의 조직구조가 뜨고, 요즘은 상황에 따라 외주를 유연하게 섞어 쓰는 운영 방식까지 등장했다. IT 기대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단순히 SaaS 서비스 하나 잘 골라 쓰는 걸 넘어서 실제 개발까지 해주길 바라고, AI까지 자연스럽게 녹여내길 바란다. MZ 문화나 트렌드도 이해해야 하고, 회사가 어느 정도 크면 이번엔 또 기성 대기업식 체계화를 요구받는다. 몇 년 사이에 요구받는 역량 세트가 통째로 바뀌는 셈이니,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따라잡기 벅찬 구간이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경력이 오래된 시니어나 리더들은 적응이 쉽지 않거나, 혹은 그저 자기 에고를 못 놓는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실제로는 새로운 툴이나 방식을 배우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는 사람들도, 그저 경력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시선을 자주 마주한다는 얘기를 한다. 몇 년 새 새로 나온 툴을 남들보다 먼저 써보고 정리해서 팀에 공유해도, 그 사람 나이만 보고 적응이 느릴 거라 짐작하는 시선은 여전히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상대적으로 스타트업 뿐만 아니라 대기업들도 어린 대표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눈치 안 보고 자기 의견이나 철학을 밀어붙이기가 더 어려워지는 분위기도 생겼다. 나이 많고 경력 화려한 시니어를 옆에 두면 자기 판단에 자꾸 제동이 걸릴까 봐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실제로 적지 않다. 회의 자리에서 나이 어린 대표가 방향을 제시했는데, 연차 많은 시니어가 과거 경험을 근거로 조목조목 반박하면 그 관계 자체가 불편해지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굳이 그 불편함을 감수하느니, 아예 그런 연차대를 채용 대상에서 빼버리는 쪽을 택하는 회사들도 많다.
정거장이 사라지면 길도 흐려진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이 허리층을 다시 채울 수 있을지 해법을 찾고 싶어진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건 허리가 왜 사라졌는지가 아니라, 애초에 허리라는 계단식 개념이 지금도 유효한가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허리는 연차가 쌓이면 자연히 도착하는 정거장 같은 거였다. 실무를 오래 하면 시니어가 되고, 시니어를 오래 하면 리더가 되는 순서.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역할이라는 게 더 이상 연차순으로 배정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조직에 필요한 일 단위로 즉석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리더라는 이름이 4년 차에게 붙기도 하고, 10년 차 베테랑에게는 정작 어떤 이름도 안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직은 사람의 연차에 자리를 맞추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에 사람을 맞추고 있는 거다.
문제는 정거장이 사라지면서 그 정거장 사이에 놓여 있던 길도 같이 흐려졌다는 거다. 주니어가 시니어가 되려면, 시니어가 리더가 되려면 원래 그 사이에 밟아야 할 역량과 경험, 그리고 그만큼의 시행착오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허리라는 중간 지대가 통째로 비면서, 그 사이에 뭘 채워야 하는지가 잘 안 보이게 됐다. 4년 차에게 리더 타이틀이 붙는 순간, 정작 그 사람이 리더가 되기 전에 겪어야 했을 실패나 조율의 경험은 건너뛴 채로 시작하는 셈이다. 과도한 월반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함은 빨리 따라잡았는데 그 직함이 원래 요구하던 판단력과 맷집은 미처 못 따라온 채로 자리에 앉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렇다면 시니어들이 다음에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몇 년 차니까 어떤 자리에 가야 한다는 계산 대신, 지금 이 조직에 없어서 못 돌아가는 일이 뭔지를 먼저 보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직함을 빨리 얹어주는 것과 그 직함에 걸맞은 경험을 쌓을 시간을 주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허리가 사라진 게 아니라, 허리를 증명하는 방식이 연차표에서 일감표로 옮겨간 거라고 보는 게 지금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데 훨씬 가까운 설명일 것 같다.
다만 그 일감표에도 여전히,
건너뛰면 나중에 반드시 티가 나는 구간은 남아 있다는 것만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해당 콘텐츠는 이드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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