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UX] 병뚜껑 속에 숨겨진 UX

 

퇴근길 헛헛한 마음을 달래는 혼술, 고된 하루를 마친 직장 동료와의 회식, 언제 만나도 반가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 목을 긁고 넘어가며 청량함을 남기는 맥주와 그 뒤를 묵직하게 받쳐주는 소주, 바로 쏘맥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이 초록색과 갈색 병 입구의 조그만 뚜껑들. 사실 이 뚜껑들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정교하게 다듬어진 UX(사용자 경험)의 재미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 실패를 거쳐 도출된 신의 한 수, 21개 톱니의 Affordance

 

칙~ 소리와 함께 맥주병이 열리는 순간, 병따개가 뚜껑에 걸려 지렛대 원리로 탄산을 터뜨리는 이 동작에는 ‘크라운 캡(Crown Cap 또는 Crown Cork)’이라 불리는 표준화된 디자인이 존재한다. 1892년 미국 발명가 윌리엄 페인터(William Painter)가 이 뚜껑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 톱니의 개수는 원래 24개였다.

 

하지만 24개의 톱니는 유리병을 너무 강하게 죄어 밀봉하기 때문에 압력을 이기지 못한 유리병 입구가 깨지는 일이 잦았고, 반대로 톱니 수를 20개 이하로 줄이자 이번에는 탄산이 새어나가거나 오프너가 헛돌아 개봉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최적의 정답이 바로 숫자 ’21’이다. 이 숫자는 7개의 완벽한 삼각형 구조가 대칭 균형을 이루며 내부 압력을 균일하게 분산시킬 수 있었고, 20세기 중반 독일의 산업표준(DIN 6099)을 거치며 오늘날 전 세계가 쓰는 ’21개’로 굳어졌다.

 

 

맥주와 콜라 등 음료수 병뚜껑에는 정확히 21개의 톱니가 있다.

 

 

음료의 품질을 지키는 ‘밀봉성(Reliability)’, 병이 깨지지 않는 ‘안전성(Safety)’, 그리고 병따개가 뚜껑을 정확히 움켜쥐게 하는 ‘행동 유도성(Affordance)’까지, 이 삼박자가 완벽한 밸런스를 맞춘 지점이 바로 21번째 마디였던 셈이다. 1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맥주병과 음료수병이 동일한 21개의 톱니를 고수하는 이유다.

 

 

 

– 재활용이 만든 뜻밖의 안전장치, 두 갈래 링의 Eco & Safety UX

 

이번엔 소주병을 따보자. 몇년 전까지만 해도 소주 뚜껑을 돌려 따면 하단의 금속 고리가 동그란 링 모양 그대로 병목에 남아 있곤 했다. 이는 소주병을 회수해 재사용하는 과정에서 꽤나 걸림돌이 되었다. 병목에 남은 알루미늄 링이 세척 과정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 유리병 재사용률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이 재활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뚜껑 하단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이중 절개선 구조다. (2020년 12월부터 도입되었으니, 얼마 안됐다.) 뚜껑을 비틀면 하단 고리가 2개의 갈고리 모양으로 갈라지며 병목에서 자연스럽게 풀려 나온다.

 

 

여전히 하나의 고리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두갈래로 갈라진다

 

 

흥미로운 점은 환경을 위해 바꾼 이 디자인이 사용자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까지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남겨진 링의 날카로운 단면에 손이 긁히거나 베여 피를 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링이 갈라져 뚜껑과 함께 배출되면서 이런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 환경을 위한 ‘재활용 디자인(Eco Design)’이 사용자의 안전까지 지켜낸 ‘프리벤션 디자인(Preventive Design)’으로 진화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 Invisible UX, 위대한 디자인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UX 디자인이라고 하면 화려한 스마트폰 화면이나 세련된 애플리케이션의 UI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참다운 인터랙션 디자인은 디스플레이 너머, 우리가 숨 쉬듯 만지는 실물 세계 곳곳에 묵묵히 스며 있다. 사용자가 병따개를 쥐고, 망설임 없이 뚜껑에 걸어 올릴 수 있는 직관성, 재활용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동시에 안전까지 챙긴 아이디어, 이 모든 것은 사용자가 디자인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미세하게 다듬어진 ‘보이지 않는 경험(Invisible UX)’이다.

 

오늘 밤, 시원한 쏘맥 한 잔으로 고단한 하루를 달랜다면 병을 따기 전 손끝에 닿는 병뚜껑을 잠시 바라보자. 그 작은 쇳조각 속에는 당신이 오롯이 그 순간의 즐거움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100년 넘는 세월, 치열하게 고민했던 디자이너들의 숨은 헌사가 담겨 있다.

 

 

우리 삶 곳곳에 숨겨진 UX 이야기

 

 


윈터노트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