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가 안 정해졌을 뿐, 말이 안 되는 요청은 없습니다

 

첫 디자인 리뷰에서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 굳습니다. “화려한데 심플하게 가면 좋겠어요.” 옆에서 보면 표정이 바로 보여요. 저걸 어떻게 동시에 하지. 자리로 돌아가 화려한 시안 하나, 심플한 시안 하나를 따로 만들어 오죠. 다음 리뷰에서 “둘 다 아닌데”가 나옵니다.

디자이너로 리뷰하던 시절, 저도 이 말을 꽤 들었습니다. 듣고 나서 알았어요. 말이 안 되는 요청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못 정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걸요. 화려함도 심플함도 갖고 싶은데 뭘 먼저 지킬지 시키는 분도 잘 모르는 겁니다. 디자이너가 할 일은 시안 두 개가 아니라 그 우선순위를 대신 꺼내주는 거고요.

 

 

그때 쓰는 질문이 딱 네 개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

 

 

질문 1. “이 화면에서 유저가 딱 하나만 기억한다면 뭐예요?”

답이 하나로 나오면 그게 화면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전부 뺄 후보입니다. 문제는 두 개 이상 나올 때예요. “가격이랑 후기요.” 화면이 복잡했던 진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못한 게 아니라 요청한 사람이 둘 다 앞에 두고 싶었던 거죠. 이 답을 받는 순간 대화는 디자인 얘기에서 뭘 앞에 둘지 정하는 얘기로 바뀝니다.

 

 

질문 2. “화려하다고 느꼈던 화면 하나만 보여주실래요?”

형용사를 레퍼런스로 바꾸는 질문입니다. “화려한”은 사람마다 그림이 다른데, 화면 하나를 가져오게 하면 그림이 하나로 맞춰지거든요. 재밌는 건 가져오는 화면이에요. 대부분 심플합니다. 배경색 하나 과감하게 깔았거나 사진 한 장을 크게 넣었거나. 원한 건 ‘많이’가 아니라 ‘한 군데 세게’였던 거죠. 말로 설명하라면 못 합니다. 보여달라고 하면 됩니다.

 

 

화려한은 사람마다 그림이 다르다?

 

 

질문 3. “지금 화면에서 빼도 되는 거 하나만 골라주실래요?”

심플은 넣는 게 아니라 빼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리뷰 자리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다 더하는 얘기예요. 여기 배너 하나, 여기 아이콘 하나. 그래서 빼는 걸 고르게 합니다. 처음엔 “다 필요한데요”가 나오지만 하나만 달라고 하면 결국 고릅니다. 고르고 나면 사고가 바뀌어요. 더하는 쪽으로만 보던 사람이 빼는 쪽으로 화면을 보기 시작합니다. 한 번 빼본 사람은 두 번째는 먼저 빼자고 합니다.

 

 

질문 4. “누가 가장 중요한 유저예요?”

가장 늦게 던지지만 제일 세게 먹힙니다. 앞의 셋이 화면 안을 정리했다면 이 질문은 화면 밖에서 기준을 잡아줍니다. B2B 어드민에서 화려함은 숫자가 한눈에 읽히는 겁니다. B2C 커머스에서 화려함은 사고 싶어지는 사진이고요. 같은 단어, 다른 정의. 유저가 누군지 답을 받으면 “화려하게”가 어느 쪽인지 그 자리에서 정해집니다.

 

 

나가며


네 질문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예”, “아니요”, “좋은 것 같아요”로 답할 수 없어요. 하나를 고르거나, 화면을 보여주거나, 뭔가를 빼야 합니다. 그렇게 나온 답을 모으면 사실상 요구사항 문서입니다. 중심 정보 하나, 레퍼런스 하나, 뺄 요소 하나, 타깃 유저 하나. 여섯 글자짜리 형용사가 네 줄짜리 요구사항으로 바뀐 거죠.

 

신입 때는 요청이 애매하면 내가 못 알아들은 것 같아 일단 받아옵니다. 그런데 애매한 요청은 대개 요청한 사람도 정리가 안 된 상태예요. 그 정리를 같이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고 질문이 그 도구입니다. 형용사가 오면 형용사로 받지 마세요. 고르게 하고, 보여달라고 하고, 빼게 하세요.

 

 

‘화려하지만 심플하게”는 모순이 아닙니다'(끝)

 

 


우디 (우디디자인랩)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