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우리가 쌓은 건 매출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공교롭게도, 100억이었다
8월 마감을 정리하다 보니 기다리던 숫자가 하나 나왔다. 창업 이후 누적 매출이 100억 원을 넘어선 것이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매출이 54억 원, 그전까지 5년 동안 쌓아온 매출이 46억 원이니 더하면 공교롭게도 딱 100억 원이었다. 24억 원을 하던 회사가 올해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해, 한 해 매출만으로도 100억 원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다.
누적 매출 100억 원이라는 숫자 앞에 서니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든다. 동시에 지난 5년 동안 있었던 힘든 일들도 하나씩 떠오른다. 첫 발주를 기다리며 버티던 시간,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애썼던 순간들, 돈이 묶여 마음을 졸였던 날들까지.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지금 이 숫자에 도착했다는 것이 새삼스럽고 감사했다. 그 숫자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5년 전이 떠올랐다.
2021년 여름 회사를 시작하고 6개월 동안 발주 하나 없이 지냈다. 직장에서는 서른 중반에 이사까지 달았고 해외영업만큼은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회사라는 계급장을 떼고 시장에 나오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자본금 1천만 원이 하루하루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첫 매출이 언제 생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6개월을 기다려 받은 첫 발주서가 1만 달러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받아봤던 발주에 비하면 작은 금액이었지만, 당시 내게는 가뭄 끝의 단비라기보다 생명수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이런 기다림은 처음도 아니었다. 2013년 화장품 업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첫 발주를 받기까지 똑같이 6개월이 걸렸다. 바이어를 찾고 제품을 제안하고, 샘플을 보내고 여러 번의 수정과 승인을 거쳐야 비로소 발주로 이어지는 화장품 제조업의 특성상 어쩌면 자연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6개월은 결코 짧지 않다. 2013년과 2021년, 두 번의 6개월은 내게 발주서 한 장이 결코 당연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2021년 어렵게 받아든 그 1만 달러짜리 발주서가
오늘의 100억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됐다.
2026년 6월, 낯선 나라 사람들의 반응
올해 6월, 덴마크 고객사와 함께 만든 노말 전용 K-뷰티 브랜드를 유럽 리테일 체인 노말(Normal)에 공식 런칭했다. 첫 발주부터 대량이었지만 실제로 잘 판매될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첫 발주가 아니라 재발주가 이어지는지였다.
런칭 직후 몇 주 동안은 특별한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이어에게서 다급하면서도 상기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예상보다 판매가 잘되고 있으니 바로 재발주를 진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재발주는 빠르게 이어졌다. 출시 두 달 만에 4차 발주까지 진행됐고, 총 발주 수량은 340만 개, 확정 수주액은 약 70억 원에 달했다. 처음 20종이었던 제품도 어느새 34종으로 늘어났다.
숫자로 확인되는 성과도 반가웠지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소비자들의 반응이었다. 후기창에는 낯선 언어로 작성된 글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번역기로 내용을 확인해보니 별 다섯 개를 준 사람도 있었고, 다시 구매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다음에는 어떤 제품이 나오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유럽의 어느 매장에서 사서 직접 써보고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밤늦게 후기창을 넘기며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화면 속 낯선 이름들에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는지 모른다.
회사 전체의 매출이 가팔라진 시점도 이때와 겹쳤다. 처음 5년 동안 46억 원을 만들었는데 올해는 불과 8개월 만에 54억 원을 만들었다. 숫자만 보면 좋은 거래처 하나를 만나 회사가 갑자기 성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노말 프로젝트가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큰 거래처 하나를 잘 만나서 회사가 성장했다’는 이야기로 남기고 싶지는 않다. 그 기회를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더 강하게 만든 시간
지금의 시스템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은 미국 대형 리테일사의 PB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였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오랫동안 구축된 글로벌 화장품 공급망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당시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내가 연구하고 있던 주제 역시 글로벌 화장품 공급망이었다. 학문으로 들여다보던 질문과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공장을 직접 소유하지 않더라도 여러 제조사의 강점을 연결하고 기획, 디자인, 제조, 품질, 인증, 물류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우리만의 경쟁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 공급망은 도식처럼 깔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 패키징 업체와 일하면서 대량의 불량이 발생해 국내에서 다시 선별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한국 생산라인에서는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고객과 약속한 납기는 다가오는데 중국 업체와 한국 제조사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일을 겪은 뒤 현지 제3자 검수를 도입하고 검수 기준과 클레임 조건도 다시 만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좋은 공급망은 문제가 없는 공급망이 아니라, 문제가 생겨도 프로젝트가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공급망이라는 것을. 힘든 일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돈이 돌지 않았던 때였다.
미국의 한 대형 리테일사와 거래할 당시 결제 조건은 선적 후 30일이었다. 규모가 큰 업체였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조건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30일이면 들어와야 할 대금이 계속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약 1억 원을 거의 1년 가까이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는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시작한 초기 스타트업이었다. 운영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늘 바닥을 보면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받은 1만 달러짜리 발주가 생명수처럼 느껴졌던 회사에서 1억 원이 묶인 것이다.
우리의 방식은 해외 바이어에게 선수금과 잔금을 받아 제조사에 지급하는 구조였다. 자본이 많지 않은 회사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1억 원이 들어오지 않으니 회사 전체의 현금흐름이 막히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다른 바이어들의 발주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장부상 매출은 늘고 회사는 성장하고 있는데 통장에는 돈이 부족했다. 그때 처음으로 돈을 버는 것과 돈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알게 됐다.
그래도 제조사와의 신뢰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바이어에게 돈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우리는 한 달 정도 뒤 제조사에 대금을 지급했다. 당시 우리 같은 회사가 1억 원의 순이익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를 팔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뒤 또 다른 일이 생겼다. 당시 가장 거래가 많았던 제조사의 제품을 출하해야 하는 날이었다. 해외에서 송금한 돈이 국내 계좌에 들어오기까지 며칠이 걸리는 상황이었는데, 제조사에서 잔금이 확인되지 않으면 출하할 수 없다고 했다. 하필 나는 인도 전시회 출장 중이었다. 한국에서는 직원이 급하게 연락해오고, 인도에서는 전화 연결까지 원활하지 않았다. 결국 잔금 일부를 먼저 보내는 조건으로 출하를 진행했지만 그날의 감정은 오래 남았다.
제조사의 입장도 이해됐다. 한 차례 대금을 늦게 받은 경험이 있었으니 또 늦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한 거래와 관계가 있는데 며칠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해와 서운함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즈니스의 냉혹함을 다시 배웠다. 관계와 신뢰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현금흐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회사가 커질수록 더 많은 운영자금이 필요했고, 바이어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받을 수 있는 결제 조건과 우리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자금 역시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가 5년 동안 진짜로 쌓은 것
돌이켜보면 우리가 지금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순간에 만들어졌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기준을 하나씩 만들었다. 그 기준들이 쌓이면서 회사의 실행 방식도 달라졌다.
지금 우리는 스킨케어를 포함한 15종의 제품을 동시에 개발하면서 100만 개가 넘는 물량을 샘플 준비부터 양산 완료까지 3개월 안에 진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2023년의 우리에게 이 숫자를 보여줬다면 아마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의 대단한 전략이 아니었다. 우리를 믿고 프로젝트를 맡겨준 고객들이 있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함께 겪으며 손발을 맞춰온 제조사와 협력사들이 있었다. 기획, 디자인, 제조, 품질인증, 물류를 하나로 연결하고 AI를 활용해 관리하는 내부 체계도 조금씩 만들어왔다. 그리고 결국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책을 찾고, 샘플 하나를 더 확인하고, 납기를 맞추기 위해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움직였던 담당자들의 시간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5년 동안 쌓은 것은 단순히 매출이 아니었다. 같은 일을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큰 규모로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시스템은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고쳐가며, 더 나은 방식으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100억이라는 숫자를 보고 있으면 내 이름 하나보다 그 과정에 함께했던 수많은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에게 제품을 맡겨준 고객, 때로는 부딪치면서도 함께 문제를 풀어온 제조사와 협력사, 그리고 매 프로젝트마다 최선을 다해준 동료들까지. 100억이라는 숫자 안에는 그 사람들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다음 5년
창업 초기의 나였다면 아마 100억이라는 숫자 자체를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숫자 앞에 서보니 관심은 조금 다른 곳으로 향한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지금의 방식을 다시 반복할 수 있는가. 화장품 하나를 잘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좋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함께 갖추면서 수십 개의 제품을 동시에 개발하고, 수백만 개의 물량을 정해진 시간 안에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만든 것은 결국 그 능력이었다. 노말이라는 좋은 기회를 만나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340만 개의 발주는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기회가 회사를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지난 5년 동안 쌓아온 시스템이 그 기회를 매출로 바꿨다고 보는 편이 내게는 더 정확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시스템을 활용해 노말 이외에도 미국과 유럽의 대형 리테일 채널들과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들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지난 5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실행 체계가 새로운 기회를 현실로 바꾸는 기반이 되고 있다.
첫 5년이 시스템을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5년은 그 시스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다음 채널로, 다음 나라로, 다음 브랜드로 우리의 방식을 확장해보고 싶다. 5년 전 나는 1만 달러짜리 첫 발주서를 받아 들고 안도했다. 그때는 100억이라는 숫자를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다음 숫자가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그 숫자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100억이라는 결과보다 지난 5년 동안 회사 안에 남은 것이 더 반갑다. 바로 시스템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숫자를 쌓고 있는가, 아니면 다음 숫자를 만들어낼 시스템을 쌓고 있는가.
철학하는 CEO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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