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이즈게임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십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에 대한 조급함. 기대. 두려움. 붉은색 달뜬 열기보다는 차분하지만 그 어느 불꽃보다 높은 온도를 지닌 파란 불꽃 같은. 서른을 앞둔 사람의 속내에서 이글거리는 ‘더 늦기 전에’라는 내밀한 욕망.

인디게임 개발자 유재원씨도 그랬다.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일구기 전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더 늦기 전에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과 기대감, 정말 만들고 싶은 게임을 과연 회사에서 만들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 서른을 앞둔 어느 날, 유재원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여기까지는 흔한 얘기다. 하지만 ‘성공’을 따져 물으면 거기서부턴 다른 얘기가 된다. 보통 인디씬에서는 ‘먹고 살 수 있고, 다음 게임을 만들 수 있으면 성공했다’고 말한다. ‘성공했다’보단 ‘살아 남았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유재원씨는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

유재원씨가 혼자 게임을 개발한 지 올해로 4년째. 혼자서 게임을 개발하고, 또 성공시킨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디스이즈게임이 그가 보낸 기쁨과 고통의 시간을 들어봤다.

/디스이즈게임 반세이 기자

 

싱글코어게임즈 개발자 유재원 (사진제공: 유재원)

# 게임을 만들기 위해 C언어를 공부했던 초등학생

“초등학교 때 엄마가 컴퓨터를 사 주셨어요. 좀 빠른 편이었죠. 머드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걸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에 따른 리액션이 오고 가는 ‘인터랙티브(상호작용)’를 그때 처음 경험해 봤는데 그게 그렇게 멋지더라고요. 그때부터 C언어를 비롯해 이것저것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유재원씨의 개발자 커리어(?)는 어언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부터 코드를 짤 수는 없었지만 오픈소스를 이리저리 다듬고 수정해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즐거웠다. 만든다는 행위 자체도 좋았지만, 만든 게임을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 하는 것이 기뻤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에게 어느 날 우울증이 찾아왔다. 극도의 무기력과 우울감으로 출석조차 힘든 나날이었다. 흔한 한국의 고등학교. 자유를 제한하는 억압된 분위기 속에 그는 지쳐갔다. 선생님은 ‘1~2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면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교까지는 제대로 졸업하길 바랐다. 힘든 나날을 버티게 한 것은 ‘대학에 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게임 개발에 대한 열망이었다.

#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게임 개발이 싫어졌어요.”

그의 생각대로 대학에 가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컴퓨터 공학을 공부한 그가 선택한 다음 계단은 당연히 게임회사였다. 고등학교 때 찾아온 우울증이 그를 내내 따라다녔지만, 겉으로 보기에 회사 생활은 원만하게 흘러갔다. 능력을 인정받아 프로그래밍 파트장까지 진급하기도 했다.

“파트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야근하자’고 말하기 힘들었어요. 그런 얘길 하면 사람들이 저를 싫어할까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일요일 낮에 잠깐 쉬고, 저녁에는 3일치 옷을 싸 회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다시 집으로 와 그 다음 3일치 옷을 싸서 회사로 갔죠. 일이 재미있었지만, 과도하게 책임감을 짊어졌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밤낮없이 1년을 보낸 뒤, 유재원씨는 고민했다. 회사는 “그간 고생했으니 이번엔 하고 싶은 것 해 보라”고 했지만, 그게 ‘사업성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통과될 만 한 것들을 찾다 보니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진짜 하고 싶은 걸 못할 것 같았다.

프로그래밍이 좋았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리 업무를 맡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잘하는 일, 하고싶은 일은 프로그래밍인데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를 계속 하다 보니 ‘지금 이게 맞는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우수 직원 상을 받는 자리였어요. “초등학생때부터 게임을 개발했다. 회사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게임을 개발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라고 주신 상인건 알겠는데, 더이상 열심히 못할 것 같다.” 소감을 이렇게 말했더니 당시 사회를 보던 개그맨이 무척 당황하던 게 기억나네요. 잘 마무리하고 나왔지만, 그때 사건으로 제가 회사에서 나쁘게 나온 줄 아시는 분들이 계세요. (웃음) 그런 것 아닌데 말이죠.”

“초등학생때부터 게임을 개발했다. 회사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게임을 개발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 첫 타이틀 <던전워페어>의 출시와 성공

2014년 여름. 회사에서 나온 그는 작은 웹게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정도의 작업이었지만 최소한 먹고 살 거리는 만들어 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14년 말부터는 영미권 커뮤니티에서 만난 팀원과 함께 <던전워페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닐 때부터 ‘타워 디펜스’를 만들고 싶던 그였다. 메이저한 장르가 아닌만큼 유저 풀이 작아 큰 회사가 진행하긴 어려웠다. 개발 난이도가 높다는 점 때문에 작은 회사가 덤비기도 만만찮았다. 참고할 만 한 자료도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적었다.

유재원씨가 회사에서 나와 처음으로 만든 타워디펜스 게임, <던전워페어>

2015년, 우여곡절 끝에 첫 게임 <던전워페어>가 얼리억세스로 스팀에 등록됐다. 그린라이트 타이틀로 메인 화면에 노출되니 투표 수가 쑥쑥 올라갔다.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게 제공한 데모 버전의 덕이 컸다. 아머게임즈나 콩그리게이트 같은 무료 게임 사이트에도 데모 버전을 올리고, 투표를 요청했다. 타워디펜스 매니아들의 지지를 받은 <던전워페어>는 2015년 11월 5일, 스팀에 정식 출시됐다.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게임이 팔리지 않았다. 스트리머도, 언론도 큰 관심이 없었다. 타워디펜스는 그런 장르였다. 매니아는 존재하지만 ‘잘 만든’ 게임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출시 직후보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게임이 팔리기 시작했다. 리뷰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 일단 게임을 잘 만들어 두니 어떻게든 유저들이 찾아왔다. 매니악한 장르의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던전워페어>는 한국 게임 중 드물게 ‘압도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 “창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질투가 심한 편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잘 되면 일단 내재적인 수용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웃음) 수용한 다음에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어요. 좀 괜찮아 보이는 게임이 나오면 어김없이 제 게임과 비교하게 되는데, 고통스럽죠. 판매량은 얼마나 되는지, 스트리머들은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계속해서 비교하고, 그러다가 여자친구한테 혼나기도 하고. (웃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가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쨌든 괴로운 건 괴로운 거죠. 창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의미있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을 사람들도 알아주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2017년 초, 유재원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비트서밋, 도쿄게임쇼, 게임 창조 오디션 등 인디게임 행사와 지원 사업에 신작 <투더헬>로 응모했으나, 모두 탈락한 것이다. 유재원씨는 깊은 절망과 우울에 휩싸였다.

“내 작품도 싫고, 나도 싫고 모든 게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때였어요. 결심했죠. ‘게임을 죽여버리자.’”

매월 진행하는 인디게임 행사 ‘서울인디즈’에서 <투더헬>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나름 격식도 갖췄다. 타이틀 사진에 마치 영정처럼 상조 띠를 두르고, 조문객들에게는 육개장을 직접 끓여줄 수 없어 사발면을 나눠줬다. 참관객들 가운데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상주처럼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서울인디즈 현장에서 치러진 <투더헬> 장례식(?)

게임을 만들면서 받는 고통의 크기를 자로 잴 수는 없겠지만, 고통의 종류는 얼추 가늠할 수 있다. 유재원씨는 공개적인 자리에 잘 나가지 않지만, 교류하는 개발자들과는 감정과 가치관을 비교적 솔직하게 나누는 편이다. 유재원씨에 따르면 모바일게임이나 F2P(Free to Play)게임을 만드는 사람들과 패키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고민을 한다. 이를테면 ‘스팀이 블루오션이다’라는 말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이 갈린다.

“스팀도 똑같아요. 어쩌면 더 지옥일지도 몰라요. 피쳐드 안 되면 힘든데, 이제 피쳐드도 거의 없어졌고요. 메인에 노출되는 2~3개 영역은 보통 AAA급이나 대형 퍼블리셔에게 돌아가죠.

F2P 게임을 만드는 분들에게 이런 걸 말하면 이해받기 좀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게임을 만드는 방향성 자체가 다른 거죠.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나 조언이 달라요. BIC 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던전워페어> 무료 버전 언제 만들 거냐고.”

스팀도 메인 피처드의 비중을 감소시키고 개인화 게임 노출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

# 혼자 게임을 만든다는 것

회사를 그만두고 1인 개발자로 전향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게임을 만드는 것 역시 장점은 있겠지만 여럿이 함께 작업하다보니 ‘나’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기 위해 회사를 나오는 사람들. 목표가 창작이든, 돈이든.

1인 개발로 어느 정도 먹고 살고, 게임도 성공시킨 유재원씨. 사람들은 묻는다.

“성공적으로 1인 개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재원씨는 ‘회사를 나오기 전 꼭 게임 하나는 혼자 만들어 보고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 게임을 만들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눈에 보이고,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다고. 그러다 보면 ‘내가 이걸 진짜 하고 싶었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게 된다고. 그런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퇴사하게 되면 진도는 안 나가고, 게임을 이리 저리 바꾸게 된다고. 그러면서 1~2년 훌쩍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내가 이걸 진짜 하고 싶었던 게 맞나?’​

유재원씨의 경우 퇴사 후 먼저 웹게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회사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러려면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놔야 할 것 같았다. 회사에 다니면서는 ‘언젠가 타워디펜스 게임과 <더 바인딩 오브 아이작> 같은 로그라이크를 꼭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재직 중 비슷한 방향으로 프로토타이핑도 하고 제안도 했기 때문에 퇴사 후 만들고 싶었던 것에 대한 방향성이 흔들리는 일은 덜했다.

“아마 회사에서 만드는 거랑은 다른 걸 하고 싶어서 나오실 거예요. 하지만 쉽지 않아요. 도중에 그만두고 회사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회사로 돌아가는 이유 중 가장 많은 케이스가 게임을 완성하지 못해서에요.

혼자서 개발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동기부여도 스스로 해야 하고, 일정을 관리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뛰어난 아티스트, 프로그래머, 기획자가 뛰어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자기 분야에서 잘 하는 거죠. 어영부영 1년 2년 시간 보내다 ‘아 더는 안 되겠다’ 하며 회사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요.”

시간은 언제나 개발자의 뒤에서 무심하게 똑딱똑딱 흘러간다.

오롯이 나의 게임을, 혼자 편하게 만들고 싶어서 1인 개발을 시작했지만 회의를 느낄 때도 있다. 유재원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근 10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다. 게임 개발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혼자 게임을 만들다 보니 과정과 결과 역시 혼자 감당해야 할 때가 많다.

그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게임에 대한 성과 뿐만이 아니다. 매일 매 순간, 사람들이 잘 될 때, 사람들이 잘 되지 않을 때. 1인 개발자가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과 맞서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은 태산처럼 많다.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보일 때, 1인 개발에 대한 회의를 느껴요. <투더헬>은 아트까지 혼자 작업했거든요. 프로그래머가 아트까지 하려다 보니 드는 시간에 비해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혼자 하는 게 편해서 혼자 개발하는데 퀄리티와 효율 차이를 체감할 때마다 여럿이 함께 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죠.

유재원씨가 기획, 아트, 프로그래밍을 모두 맡아 제작한 <투더헬>

보통 점심쯤 기상해 점심먹고 일하기 시작합니다. 저녁먹고는 자율적으로 이것저것 프로토타이핑도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하고요. 시간대가 다를 뿐이지 규칙적으로 일하고 있어요. 규칙적으로 일하는 게 게임을 성공시킬 수는 없지만 게임을 완성시킬 확률은 높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우울증이 심할 때는 하루에 코드를 10줄도 못 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완전히 놔 버리면 습관을 다시 만들기 어렵거든요.”

# 20년 가까이 게임 개발을 이어가는 이유

초등학생 때부터 게임을 만들어 온 그가 20년 가까이 게임 개발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뭘까.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20년을 살아간다는 것. 확신할 수 없지만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 누군가는 죽을 듯이 이해하고, 누군가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만드는 건 즐겁고 또 고통스럽죠. 항상 감정의 변곡점이 있어요. 처음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와 이건 최고야’하는 순간이 있죠. 그러다가 점점 내려가서 ‘내가 이런 쓰레기를 왜 만들고 있지’하고 바닥을 찍어요. 그게 너무 심하면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고요.

어떻게든 계속 잡고 있으면 반등이 올 때가 있어요, ‘어, 이거 좀 괜찮네?’하고요. 처음에는 막 들떠있다가 어느정도 자기 객관화가 이뤄진 상태에서 게임이 괜찮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요. 나와 게임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희망이 보이는거죠. 내가 지금까지 못하진 않았구나.

“내가 이 장르 팬인데, 이 게임이 내가 해 본 게임 중 최고야”. 하는 얘기 들었을 때도 좋았어요. 한 번은 트위터에서 멘션을 받았는데 프로필을 클릭해서 들어갔더니 루게릭병을 앓고 계신 분이더라고요. 그 분의 한정된 시간에 제 게임이 기쁨을 드렸다고 생각하니 저도 기뻤죠. 나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