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일로 멘붕한 경험이 있다면

 

스타트업 코칭할 때, 브런치에 글 쓸 때, 그리고 미매뉴얼을 통해 여러분께 조언드릴 때 항상 빼지 않고 드리는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우선순위화’입니다. 업무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한 명이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나 일은 밀려드니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우선순위화’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우선순위화 그 자체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이 말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텐데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인 우선순위화를 하나의 문제로 취급하니까 말이죠.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선순위화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아는데도( = 지식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잘 안 되는 것은 아래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귀에 못 박는 중 (From 영화 ‘기생충’)

 

1. 감정이나 분위기 자체에 압도되고 휘말린다.

정서적 불안정엔 불안이나 우울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요소들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정서적 취약성, 즉, 외부 상황이나 타인 때문에 내 감정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죠. 감정이 크게 올라온다는 건 결국 우리 뇌에서 그 감정을 처리의 최우선 순위에 둔다는 뜻입니다. (화나면 감정 조율도 안되고, 말도 잘 안 나오고, 몸짓도 이 화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 순간엔 우리 이성의 통제보다 화라는 감정이 위에 있고, 최소한 뇌에게는 그게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뇌는 멀티태스킹에 상당히 취약한 프로세서입니다. 그래서 불쑥 올라온 감정을 처리해서 우선순위를 낮출 때까지는 업무 따위는 리스트 상단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이 감정이 불안이거나 분노면 불안하다 or 화난다는 이유 때문에 업무에 대해 체계적으로 사고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선순위화하려면 그전에 업무를 체계적으로 나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MECE 가 필요한데, 제대로 하려면 뇌가 과열 상태를 벗어나야 하죠. 감정을 강하게 느낀다는 건, 컴퓨터 CPU가 100% 사용상태여서 엔터키를 때려도 화면이 넘어가지 않고 멈춰있는 상태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감정의 정체가 우울이면 업무를 프로세서에 올려서 처리하려는 의욕이 사라져 버려서 역시 체계적 분류가 안됩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우선순위화는 물 건너가고 우리 머리에 학습되는 건 감정의 찌꺼기와 심각한 패배감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상사와 갈등이 생기게 된 건 덤이고요.

 

2. 업무가 아닌 것들이 우선순위에 불쑥 올라온다.

우선순위화를 잘하려면 업무를 경중이나 시급성 등의 기준으로 나눠야 합니다. 하지만 외향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 특히 이런저런 관심사가 많거나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중요시하거나 혹은 무모하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은 업무 리스트에 갑자기 자기 관심사를 끼워 넣습니다.

가령 오늘 내로 끝내야 하는 업무 리스트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동호회 모임 저녁식사가 떠오르면 거기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일을 프로세싱하다가 데드라인이 다 되어서야 급하게 업무를 처리합니다. 당연히 업무 우선순위 따위는 저 멀리 떠나가고 아웃풋은 수준이 낮죠.

자기에게 이런 성향이 있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제법 있지만 있어도 인정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많고, 이런 성향 때문에 주변의 평가와 자기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 사이에 큰 갭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는 유능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이죠.

 

3. 뇌에 생각할 시간을 안 준다.

소위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 혹은 의존성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문제입니다. 이들은 업무의 경중을 파악하는 기준이 외부에 존재합니다. 타인의 눈치, 조직 분위기,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부서의 큰 일들이야 상사들이 우선순위화 해주지만 자기에게 떨어진 일들도 다시 우선순위화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형에 눈을 붙이는 단순 노동이라고 해도 어디서 하는 게 편할지 자리를 정리하고 필요한 부속품은 손이 닿기 편하게 배치하고, 산출물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등의 업무 구분과 우선순위에 따른 준비가 필요합니다만, 이들은 그냥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사전 준비를 하기 위해 자기 주도적으로 약간의 생각을 하고 일에 뛰어드는 사람보다 훨씬 느리게 일이 진행되고 나중에서야 ‘아, 그렇게 할걸’ 하고 후회하지만 다른 일이 다시 주어지면 결국 그냥 ‘열심히’할 뿐입니다.

왜냐면 자기에게 우선순위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외부의 요청’이지 ‘일을 잘하려고 하는 내적 동기부여’가 아니기 때문이죠. 일을 시작하기 전 5분 동안만 일의 진행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해결될 문제지만, 이들의 두뇌는 이 5분을 기다리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이건 태도나 의지의 문제 이전에 존재하는 ‘성격’입니다. 즉, 패턴화/자동화되어 있으며 인식 이전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단계이지요. 그래서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4. 업무에 대한 지식/경험, 또는 학습 역량 자체가 부족하다.


회사에서 직원을 뽑다 보면 정말 의욕도 있고 착하지만.. 안타깝게도 복잡한 일을 스스로 우선순위화하며 일을 처리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업무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경험 부족 때문이거나 학습 역량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이유가 큰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 성격이 강해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거나, 학습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거나, 기반이 될만한 지식과 경험이 아예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업무를 우선순위화해서 처리하라고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야 안 통합니다. (아무리 능숙한 셰프라고 해도 자기 주종목이 아닌 것을 갑자기 만들라고 요구하면 기본적인 순서조차 헷갈려하며 버벅거리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업무 매뉴얼입니다. 본인이 이런 유형이라면 일단 회사에서 일이 처리되는 순서에 대한 학습을 충실히 하는 게 우선이고, 부하직원이라면 알아서 잘하라고 할게 아니라 구체적인 매뉴얼을 주면서 과정의 능숙도와 자신감을 높여줍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스스로 작은 영역에서라도 주도적으로 학습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맞습니다.

 

 

마치며 

일 잘하는 법을 알려주려면, 단순히 업무를 MECE 하게 나누고 우선순위화하라고 툭 던지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성격상 안 되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우선 제시해주고, 이후에 방법을 알려주는 게 옳습니다. 물론 상사나 코치로 이렇게 조언해주려면 그냥 방법을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하게 살아야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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