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컨설팅 업무가 잘 풀렸다. 솔직히 다른 일 때문에 신경을 덜 썼는데 고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평소 아내에게 일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엔 ‘고객들 반응이 괜찮네’라며 은근히 자랑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저녁 늦게 고객 한 명으로부터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아침에 전달 받은 자료가 본인이 원했던 결과물이 아니라고 했다. 속으로 아차 싶었다. 솔직히 이번 컨설팅할 때 조금 게을렀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항상 그랬던 거 같다. 노력한다고 늘 보상이 뒤따르진 않았다. 노력은 때론 배신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 게을러졌다 싶으면 항상 크고 작은 문제가 터졌다. 게으름은 배신하지 않는다.

 

 


 

 

게으름, 치명적인 실수를 낳다

 

군대 시절 포병 여단 직할 대대에서 비밀문서를 다루는 통신소대 무전병으로 복무했다. 도청, 감청당하기 쉽기 때문에 무전 통신을 할 때는 직할 대대의 주요 직책을 부르는 이름이 주기적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우리 부대 대대장은 이번 달에는 ‘갈매기’로 불리다가, 다음 달에는 ‘선무당’으로 불리는 식이다. 이런 내용들이 통신 비밀문서에 담기는데 내 역할은 여단 직할 대대에 비밀문서를 보내는 일이었다. 주요 직책이 많은 부대일수록 수령하는 비밀문서가 많았다.

무전병이지만 비밀문서를 다뤘기에 동기들보다 몸이 편했다. 매일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바깥 세상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멀스멀 마음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사달이 났다. 이상하게 비밀문서 발송을 마쳤는데, 사무실 서랍에 비밀문서 일부가 남은 것이다. 이미 발송이 다 끝났기 때문에 어느 부대에 얼마만큼 덜 보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통신장교에게 말을 해야 하나?’ ‘어느 정도 징계를 받을까?’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편안함 속에 게을러진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시 부대 간 통신해야 하는 훈련이 없어서 내 잘못은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한번 식은땀을 흘린 후로는 몇 번을 검토하고 비밀문서를 발송했다.

외국계 기업에서의 7년은 내 직장생활 중에서 워라밸이 가장 좋았던 기간이었다. 출근은 아침 9시 반, 야근은 한 달에 한번, 회식은 분기에 한번 정도였다. 전략기획 매니저였던 내 업무는 정기적인 것들과 비정기적인 것들로 나뉘었다. 비정기적인 것들은 C레벨이나 글로벌 본사에서 지시가 내려온 경우이거나 내가 직접 일을 벌인 업무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비정기적인 업무가 없어서 정말 한가할 때도 있었다. 이직 후 4년 정도가 지나면서 업무가 익숙해지고 외국계 기업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또 다른 성장을 위해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회사에 대한 애정이 식었고 회사 업무 처리가 느슨해졌다. 인정하긴 싫어도 게을러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게을러졌다는 것은 정기적인 것들만 하고 비정기적인 것들을 줄여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정기적인 것들도 미리미리 하기보다는 마감일이 닥쳐야 했다. 물론 마감일을 어기진 않았지만 나의 게으름이 결과물에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보스가 나에게 경고는 준 방식은 의외였다.

 

 

사람이 게을러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 결과물에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똑똑한 보스라면 그걸 금방 알아챈다. 보고서에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할 내용만 들어 있고 발품을 팔아야 하거나 고민을 해야 나오는 내용들은 쏙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보스가 나에게 경고를 준 방식은 의외였다. 대표에게 보고할 월간 보고서 초안을 만들면 보스가 살짝 손을 본 후 보고하게 되어 있는데, 어느 날은 특별한 코멘트가 없었다. 내용을 많이 채우지 않아서 코멘트를 주면 그 내용만 보강해서 완성할 심산이었는데 의외였다. 그리고 보스와 함께 대표에게 보고하러 갔다. 그런데 보스가 대표에게 보여준 자료는 내가 만든 초안과 너무 달라져 있었다. 보스는 혼자서 자료를 보강했고 내가 봐도 충실한 자료를 만들어 직접 보고했다. 보고가 끝나고 보스는 나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가 아직까지 생각이 있고 정신이 있다면 알아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이후 2, 3년을 더 회사에서 버티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사람 앞에선 당당, 일 앞에선 겸손

 

사람은 당당해야 한다. 프로의식을 갖고 누구 앞에서라도 본인 업무와 영역에 관해서는 최고인 양 행동해도 좋다. 실력과 결과가 뒷받침된다면 많은 사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 앞에서는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다. 일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 당당하자.

일 앞에서 겸손하자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 앞에서 당당하더라도 돌아서서는 언제든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차분하게 계획한 대로 하나씩 해결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선 들뜬 마음을 내비쳤더라도 일 앞에선 자신이 자신을 감독하는 자세로 철저하게 일하는 것이다.

직장인 경영 토론 모임 운영자를 하면서 영어로 진행되는 모임을 운영하다 우리말로 진행되는 모임을 진행하게 된 적이 있다. 생각해보자. 영어로 모임을 운영하는 것과 우리말로 모임을 이끄는 것 어느 것이 쉬울까? 장단점이 있지만 당연히 우리말이 쉽다. 영어 모임 운영도 참석한 멤버들의 피드백이 좋았기에 우리말 모임 역시 자신 있었다. 실제로 첫 모임 진행 결과 어렵지 않았고 한 두 차례 진행해보니 전체적인 진행의 틀이 잡혔다.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모습을 칭찬하는 주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게을러졌다. 영어로 진행하는 모임을 준비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해당 아티클을 여러 차례 정독하고 공부했는데, 우리말로 진행하니 아티클은 한 번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러다 하루는 당일치기로 모임 준비를 하게 됐다. ‘하루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결과가 어땠을까? 모임은 어떻게든 진행됐다. 그런데 적어도 진행자면 일반 참석자들과 달리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전해주면서 자유롭게 토론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하다 보니 임기응변식으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이 눈치를 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자업자득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게으름은 이번에도 배신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식은땀을 흘린 경험을 통해 우리말로 진행하는 모임도 영어 모임처럼 일주일의 여유를 두고 준비하게 됐다.  

이렇듯 일 앞에서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은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엮여 있을 때 더욱 중요하다. 내가 작업한 결과물이 내 이름을 달고 상대방에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성장의 밑거름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하게 배신하지 않는 게으름 덕분에 많이 성장했다. 우리는 대개 작은 성공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식은땀 흘린 경험 덕분에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린 경험은 대부분 내 게으름에서 기인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어한다. ‘너 정말 게으르구나!’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창피한가? 다행히 어른이 된 이후로 부모님을 제외하면 직설적으로 자신에게 게으르다 말하는 이들은 없다. 대신 본인이 느낀다. ‘내가 요즘 많이 게을러졌구나!’ 아니면 게으른 자신으로 한바탕 큰 일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하기도 한다. 이때가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시기다.

 

 

같이 프로젝트했던 매니저가 카페에서 면담을 요청했다.

 

 

컨설팅 회사 임원 시절 중요 업무 중 하나는 People Management였다. 모든 직원들이 성취감을 느끼며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하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그러다 애매한 상황이 발생했다. 회사 전체 임원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한 팀을 맡게 된 것이다. 전략 고객을 관리하는 팀이다 보니 초기에는 팀원들과 팀 프로젝트를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임원으로서 전체 직원들을 챙겨야 하는 People Management를 게을리하게 됐다. 당시 다른 팀의 매니저들과도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마무리를 앞두고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게 되었다. 하루는 본사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해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있는데, 메신저로 해당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타 팀 매니저가 면담을 요청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 있으니 잠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느끼고 본사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페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내가 한쪽만 생각하고 다른 한쪽을 배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 컴플레인을 했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고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얘기하고 내가 더욱 책임감을 갖고 마무리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의 끝맺음을 잘 돕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윈윈이 되었다. 난관의 연속이던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부끄러움이 더욱 책임감 있는 임원이 되게 만들었다.

 

 

익숙한 게으름은 낯선 노력으로 극복하자

 

최근 캐나다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에, 넓은 땅덩이, 그리고 프리랜서의 삶까지 모든 것이 게을러지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에게 적합한 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검색해 팀간트(teamgantt.com) 체험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를 등록하고 세부 업무를 적고 스케줄을 정리했다. 지금도 글쓰기 업무 타이머를 켜 두고 글을 쓰고 있다. 꽤 효과적이다. 스케줄만 제대로 입력한다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게 보이고, 얼마나 진도를 나갔는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했는지 정확하게 기록된다. 물론 툴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지만 본인이 약한 부분은 사람이든 도구든 도움받기를 추천한다.

 

 

본인이 약한 부분은 사람이든 도구든 도움 받기를 추천한다.

 

 


 

 

게으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부지런함일 수도, 아니면 노력이나 열정일 수도 있다. 사실 반대말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지런함, 노력, 열정은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하지만 게으름은 그렇지 않다. 녹슨 기계처럼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 평소 일에 대해서 겸손하고, 게으름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해 성장의 계기로 삼고, 다양한 툴을 사용해서 게으름을 극복해보면 어떨까?

 

 

Mark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