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의 승부는 개막 전에 절반 끝나 있다

 

 

부스를 차려놓고 기다렸다


해외 전시회는 보통 국가관으로 참가한다. 국가관을 운영하는 기관이 부스를 일률적으로 세팅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벽에 들어갈 이미지를 넘기고 현장에서 샘플과 대표 제품을 진열하는 정도다. 부스가 완성되면 그럴듯해 보인다. 이제 바이어가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조용하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하는 전시라면 추첨 행사나 SNS 팔로우 이벤트로 사람을 모으기도 하지만, B2B 전시회의 성격상 그런 행사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부스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지나가는 사람은 많은데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적고, 멈춰도 카탈로그만 집어 들고 간다. 그렇게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전시회가 적지 않았다. 전시회는 부스를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다. 부스는 무대일 뿐이고, 그 무대에 누가 오를지는 개막 전에 이미 상당 부분 정해진다.

 

 

 

다음 전시회에서 우리 제품을 다시 만났다


전시회에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의 문제다.

마스크팩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원단에 색상을 넣은 제품을 개발해 전시회에 들고 나간 적이 있다. 우리의 최신 제품이었고, 자신 있었고, 그래서 부스 전면에 놓았다. 반응도 좋았다. 그런데 다음 전시회에서 다른 회사의 부스를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지난번에 내놓았던 그것이 거기 놓여 있었다.

 

그때 알았다. 전시회는 우리 제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쟁사에게도 보여주는 자리라는 것을. 부스를 지나가는 사람이 전부 바이어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동종 업계 사람도 그 통로를 걷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내놓을 수는 없다. 우리만의 것을 내세워야 사람이 멈춘다. 그런데 가장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카피의 대상이 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공개할 것과, 아껴둘 것

 

 


우리가 찾은 답은 무엇을 내놓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내놓느냐를 바꾸는 것이었다.

 

 

부스에는 우리가 밀고 있는 주력 제품을 놓는다. 이미 시장에 나가 있고, 회사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것, 아직 시장에 없는 최신 제품은 부스에 두지 않는다. 대신 미리 약속을 잡은 기존 고객에게만 따로 보여준다.

 

효과는 두 가지였다. 카피당할 위험이 낮아진 것이 하나고,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하나 더 있었다. 기존 고객들이 그 자리를 특별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전시장 한복판에서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만 보여준다는 감각. 같은 신제품 소개인데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가 되는 것이다. 방어책으로 시작한 방법이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방법이 됐다.

 

그래서 전시회 준비의 절반은 사전 연락이다. 참가가 확정되면 기존 고객과 만나고 싶은 잠재 고객에게 미리 연락을 돌려 부스 방문 약속을 잡는다. 전시 기간 중의 미팅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전시가 끝난 저녁 시간에 따로 만나는 자리는 오히려 더 깊은 대화가 오간다. 낮의 전시장은 시끄럽고 서로 바쁘지만, 저녁의 식사 자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약속이 잡힌 채로 전시회에 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시회의 성격 자체를 바꾼다. 전자는 예정된 미팅들 사이사이에 새로운 만남이 더해지는 전시회고, 후자는 아무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전시회다.

 

 

 

1천 원짜리 가면 열 개


그렇다면 약속 없이 지나가는 사람은 어떻게 멈춰 세울까. 오래전 마스크팩 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전시회를 앞두고 다이소에 들렀다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가면을 봤다. 하나에 천 원. 열 개를 사서 부스 벽에 붙여두었다.

 

그런데 그게 통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게 뭔가 싶어 걸음을 멈추고 물어봤다. 저 가면은 뭐냐고. 그 질문에서 대화가 시작됐고, 몇 마디 스몰토크를 나누다 자리에 앉히면 상담이 됐다. 그 전시회에서 평소보다 많은 상담을 했다. 부스에 놓는 것이 반드시 우리 제품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필요한 것은 걸음을 멈추게 하는 궁금증이다. 사진을 찍고 싶어지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독립 부스를 직접 디자인해 독특하게 꾸밀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예산이 넉넉한 회사의 이야기다. 국가관 부스처럼 조건이 정해져 있고 예산도 빠듯하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 궁금증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실력이다. 천 원짜리 열 개로도 된다.

 

 

 

그날 밤에 보내는 메일


전시회의 마지막 일과는 부스 정리가 아니라 메일 발송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시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일은 최대한 빨리, 가급적 그날 안에 보낸다. 상세한 제안이나 견적은 한국에 돌아가서 보내도 된다. 그러나 감사 인사와 회사 소개서만이라도 그날 밤에 도착해야 한다. 상대가 그날의 대화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 때 도착하는 메일과, 일주일 뒤 기억이 흐려진 다음 도착하는 메일은 완전히 다른 메일이다.

 

그리고 사진을 함께 보낸다. 상담 중에 양해를 구하고 찍은 사진, 상대가 관심을 보였던 제품 사진. 바이어는 그날 수십 개의 부스를 돌았고 우리는 그중 하나다. 사진은 그 뒤섞인 기억 속에서 우리를 특정해준다. 사실 도움이 되는 것은 상대만이 아니다. 하루에 수십 건의 상담을 하고 나면 나조차 얼굴과 이름이 헷갈린다. 사진은 상대의 기억을 살리는 동시에 나의 기억도 살린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명함이 한 뭉치 남는다. 그런데 전시회의 성과는 명함의 개수가 아니다. 몇 달 뒤에도 메일이 오가고 있는 회사가 몇 곳인가 — 그것이 그 전시회의 진짜 성적표다.

 

 


철학하는 CEO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