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4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날입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코앞인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샤를 드골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땅에 상륙하는 작전에 정작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드골은 제대로 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드골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날 처칠은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우리가 유럽과 넓은 바다 사이에서 고르라면, 우리는 언제나 바다를 택할 겁니다.
내가 당신과 루스벨트 사이에서 고르라면, 나는 언제나 루스벨트를 택할 겁니다.”
두 사람은 나치 독일이라는 같은 적을 두고 4년 동안 함께 싸워온 동맹이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오간 말은 이랬죠.
하지만 불과 다섯 달 뒤, 같은 두 사람은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나란히 걸었습니다. 환호하는 군중 사이에서, 처칠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운 4년. 처칠과 드골은 도대체 어떤 사이였을까요? 오는 11월 국내 개봉하는 영화 <드골>이 가장 공들여 그린 관계, 처칠과 드골의 ‘불편한 동맹’을 따라가 봤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장군에게 마이크를 건넨 사람
시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칠이 없었다면 드골의 저항은 시작조차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무너지던 무렵 런던에 나타난 드골은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었습니다. 군대도, 정부도, 돈도 없었죠. 그런 그를 처칠은 ‘운명의 사나이(l’homme du destin)’라고 불렀습니다.
말만이 아니었습니다. 처칠은 드골에게 BBC 라디오 마이크를 내주었고, 영국 정부는 그를 ‘자유 프랑스인의 지도자’로 인정했습니다. 자유 프랑스의 초기 운영 자금도 영국이 댔습니다. 드골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죠.
“그는 곧바로 도움을 주었고, 우선 BBC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첫 균열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찾아옵니다.
1940년 7월 3일, 영국 해군이 알제리의 메르엘케비르 항구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합니다. 프랑스 함대가 독일의 손에 넘어갈 것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 공격으로 프랑스 장병 1,29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제의 동맹이 자국 수병들을 죽인 것입니다. 처칠 스스로도 “내가 관여한 결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한 일이었죠.
간신히 사람을 모으던 드골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과의 동맹을 깨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맞설 길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이지만 결코 같은 편만은 아닌 관계. 두 사람의 4년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같은 적, 다른 계산
두 사람은 왜 이렇게도 자주 부딪혀야 했을까요? 답은 성격보다 각자가 짊어진 무게에 있습니다.
| 윈스턴 처칠 | 샤를 드골 | |
| 처지 | 홀로 버티는 영국의 총리 | 나라를 잃은 망명 장군 |
| 가장 필요한 것 | 미국의 참전과 지원 | 프랑스가 여전히 ‘강대국’이라는 인정 |
| 두려운 것 | 동맹의 분열, 루스벨트와의 마찰 | 영국·미국의 꼭두각시로 보이는 것 |
처칠에게 드골은 소중한 동맹이었지만, 여러 동맹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1941년 미국이 참전한 뒤로는 루스벨트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해졌죠. 그리고 루스벨트는 드골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드골에게는 가진 것이 ‘프랑스’라는 이름뿐이었습니다. 영국의 돈으로 움직이는 망명 장군이 영국의 뜻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프랑스 국민 눈에는 꼭두각시로 비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는 도움을 받을수록 더 꼿꼿해져야 했습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드골을 ‘가장 까다로운 동맹’이라고 부르자, 드골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럴 테지요. 프랑스는 강대국이니까요.”
가진 것 없는 장군이 내세운 가장 큰 무기, 바로 자존심이었습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운 4년
작품소개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는 4년짜리 브로맨스’. 실제 역사도 그랬습니다.
1942년 11월 — “프랑스는 도둑질로 얻는 게 아니다”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을 펼칩니다. 약 10만 명이 동원된 이 작전을, 드골은 사전에 전혀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처칠은 하루 전에라도 알리려 했지만 루스벨트가 반대했죠. 소식을 들은 드골은 격분했습니다. “프랑스는 도둑질로 얻는 게 아니다!”
1943년 1월 — 카메라 앞에서만 나눈 악수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가 만났습니다. 미국이 드골 대신 내세운 인물, 앙리 지로 장군과 드골을 한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죠.
처칠은 “오지 않으면 당신 없이 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경고까지 보내며 드골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두 장군은 끝내 합의하지 못했고, 루스벨트의 요청으로 카메라 앞에서 악수만 한 번 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를 ‘억지 결혼’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가진 것 없는 망명 장군이 연합국의 두 정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입니다. 떠나는 드골의 뒷모습을 보며 처칠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저 사람은 마치 뒤에 200개 사단을 거느린 스탈린 같군.”
이 카사블랑카 회담은 2편 <드골2: 자유의 시대>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합니다.
1944년 1월 — 프랑스어 농담으로 풀린 점심
늘 날선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함께한 점심 자리에서, 서툰 프랑스어로 유명했던 처칠은 이렇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장군이 영어를 이렇게 잘하게 됐으니, 이제 내 프랑스어도 완벽하게 알아듣는군요.”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었고, 드골도 함께 웃었다고 합니다.
1944년 6월 — 상륙작전 전야의 폭발
그리고 다시, 도입부의 그 장면입니다. 프랑스 해방의 출발점이 될 상륙작전에서 프랑스군 지휘부는 배제됐고, 드골은 작전 직전에야 런던으로 불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의 라디오 연설 순서와 해방된 프랑스의 행정권을 두고 상처가 되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선 드골의 연설을 듣고, 처칠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옆에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참모에게는 “자네는 감정도 없나!”라고 호통을 치면서요.
다투면서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사이. 두 사람은 끝까지 그랬습니다.
1944년 11월 11일, 샹젤리제의 눈물
1944년 8월, 파리가 해방됩니다. 그리고 석 달 뒤인 11월 10일, 처칠이 파리로 날아옵니다.
다음 날은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었습니다. 드골과 처칠은 지붕 없는 차에 나란히 올랐고, 환호하는 군중 사이로 샹젤리제 거리를 함께 걸었습니다. 불과 4년 전 런던에서 마이크 하나로 시작한 망명 장군이, 그를 받아준 총리를 해방된 자기 나라의 수도로 맞이한 것입니다.
동행한 이든 외무장관은 이날의 처칠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윈스턴은 한시도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달 전에는 “당신과 루스벨트 중에서라면 언제나 루스벨트”라고 소리치던 그 처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전쟁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1958년 드골은 파리에서 처칠에게 자유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해방 훈장’을 직접 수여합니다. 그리고 1965년 1월 처칠이 세상을 떠나자, 드골은 영국 여왕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 위대한 드라마에서, 그는 모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다투고, 가장 많이 의지했던 사이. 그것이 처칠과 드골의 ‘불편한 동맹’이었습니다.
전장보다 뜨거운 협상장, 영화 <드골>
영화 <드골>은 이 관계를 이야기의 한가운데 둡니다. 작품소개서가 내건 핵심 문구도 ‘전장에서는 적과, 협상장에서는 동맹과 맞서다’입니다.
사막의 전투가 폭발음으로 긴장감을 만든다면, 런던의 집무실과 카사블랑카의 회담장에서는 말 한마디가 총성이 됩니다. 드골이 한 발만 물러서면 프랑스가 협상 테이블에서 사라지기 때문이죠.
처칠 역은 영국 배우 사이몬 러셀 빌이, 드골 역은 시몬 압카리언이 맡았습니다. 작품소개서는 처칠을 ‘드골의 가장 든든하고 가장 골치 아픈 동맹’이라고 소개합니다. 두 배우가 마주 서는 장면마다 어떤 불꽃이 튀질지 지켜볼 만합니다.
참고로, 처칠의 집무실과 전쟁상황실, 드골의 칼튼 가든스 사무실은 모두 파리 외곽 스튜디오에 새로 지은 감쪽같은 세트입니다. (→ 촬영 비하인드가 궁금하다면?)
<드골: 저항의 시작>은 11월 11일, <드골2: 자유의 시대>는 11월 25일 차례로 개봉합니다.
국내 개봉일인 11월 11일은 두 사람이 해방된 파리의 샹젤리제를 함께 걸었던 바로 그날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편했고, 그래서 더 각별했던 두 사람의 4년을 스크린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료 및 이미지 제공: ㈜모비데이즈 배급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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