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로 기억하는데요, 당시 모 통신사에서 영상을 제작하던 저는 미국에서 열린 가수 ‘비’의 공연장면을 편집하고 있었습니다. 특파원이 가수 비의 공연장에서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한국 본사로 보내면, 제가 그걸 편집하는 방식이었는데요. 당시 영상이 도착하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구경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국인 가수인 비가 미국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장면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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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억이 제게도 강렬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특파원의 촬영 솜씨. 무슨 파라노말 액티비티도 아니고 영상이 미친듯이 흔들려 편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는 분명 미국 공연이라고 했는데, 금발의 누님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였죠. 그냥 봐도 한국인 유학생 등등으로 보이는 누님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중국 한한령 의혹

중국에 소위 한한령(限韓令). 즉 한류 경계령이 떴다는 소식입니다. 공식 채널로는 여전히 부정되고 있으나, 현 상황에서는 다소 실체가 있어 보입니다. 중국 엔터 및 콘텐츠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렵다’고 하더군요.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건들였고, 이 과정에서 보복이 행해지고 있다는 논리가 우세합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등장한 박신희 이오에스엔터네인먼트 대표는 “광전총국으로부터 내려온 대표적인 한한령 관련 지시는 한국 연예인의 광고 금지 및 한국 드라마 방영 불가 조치”라고 명시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광전총국의 한 관료가 공식 SNS 계정에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건전한 민족문화산업을 보호 촉진하고 중국 연예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한한령에 돌입한다는 글이었어요. 하여튼 뭔가 벌어지기는 벌어지나 봅니다.

흠…실체는 뭘까요?

저도 업계 관계자 몇몇을 돌아보며 간접적으로 체감하는 수준이지만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인정하지 않는 스타일. “한한령은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에요. 오비이락 뭐 이런거라는 거죠. 두번째로는 뭐 당연하지만 “한한령은 실체가 있다”입니다. 특히 엔터와 콘텐츠 쪽 인사들이 이러한 주장을 폅니다. 다만 이들은 최근 사드 배치를 핑계로 한한령이 떨어졌다고 보지는 않는 분위기입니다. 사드 배치가 아니라, 국내 콘텐츠의 매력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특히 마지막 주장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사드 및 정치적 이슈가 아닌, 그냥 한류의 경쟁력이 상실됐기 때문에 한한령과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죠. 매우 그럴듯합니다.

이미지: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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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실체와 비하의 문하

최근 가만히 보면 한한령은 분명 실체가 있어 보입니다. ‘한한령은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이제는 침묵하는 듯. 공식채널에는 들리지 않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중국의 행보에 할 말이 없어진 것 같아요. 네, 그냥 요즘 분위기만 봐도 한한령은 일정정도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한령이 바로 한류의 한계라는 지적. 그러니까 사드나 기타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 그냥 한류가 생명력을 다했다는 주장도 일견 맞아 보입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한류. 국가가 나서서 온갖 수출물품에 한류를 붙였고, 겨울연가가 주목을 받으니 마치 한류가 아시아를 지배한 것처럼 보였죠.

분명 한류는 ‘뭔가 있었다’싶은 아이템이지만, 이제는 울궈먹기에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국도 이제 질린겁니다. 고도 성장기를 거쳐 어느정도 경제 안정기에 들어선 중국도 이제 무작정 한류에만 목맬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한류도 발전이 없었어요.

천편일률 드라마와 아이돌…최근만 봐도 그래요. ‘별그대’가 인기를 끌었더니 이번에는 ‘푸른 바다의 전설’입니다. 전 그냥 별그대 스핀오프 보는 줄 알았습니다. 똑같은 설정에 똑같은 캐릭터, 딱 중국인들이 좋아할만한 드라마를 기획하고 한국에서 버즈를 일으킨 후 바로 대륙에서 돈 빼먹을려는 의도가 보였다면, 제가 너무 날이 선 것일까요? 이런게 계속 반복되면 제가 중국인이라도 짜증날 듯 합니다. 당분간은 먹히겠지만 계속 이런식이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 보여요.

이미지: 푸른 바다의 전설
이미지: 푸른 바다의 전설

정리하자면 엔터의 측면에서 한류는 실체가 워낙 불분명했고, 비즈니스 모델도 불투명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있기는 했어요. 그래서 나름 성공도 하고 인기도 누렸지만 그 장사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에 중국도 자신감을 가지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 시작했으니 말 끝났죠 뭐.

맞습니다. 한한령이 있다면, 그건 사드가 아니라 한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키우지 못한 우리의 잘못입니다.

글쎄, 그것 뿐일까?

그런데 말입니다. 한류 콘텐츠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우리의 패착도 있어 보이지만, 그게 뭐 그렇게 죽을죄인가요? 뭐 일정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너무 그러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엔터적 측면을 넘어 글로벌 ICT, 나아가 경제 및 정치적 상황을 보면 최근 대세는 보호무역주의입니다. 시대가 팍팍해지니 다들 문 걸어 잠그고 지갑을 덜 열어요.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중국은 ‘일대일로’라든가 ‘실크로드 재연’ 등등을 내세우며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분쟁을 벌이는 등 중화민족 정신을 살리려고 하죠. 한한령이든, 한류의 한계 등등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세계적 추세와 맞물린 경향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에요. 한류는 어쨋든 있었으니까요. 그걸 돈으로 풀어먹거나 지속가능한 모델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걸 해낸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세상이 힘들어진 것도 고려사항에 넣고, 막강한 내수시장이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고민을 하면 그만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