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나비와 같은 곤충류는 탈피를 한다. 탈피를 하는 이유는 겉껍질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속살이 자라면서 겉껍질을 벗어야만 성장할 수가 있다. 그렇게 탈피를 한 곤충들은 본인이 벗은 겉껍질을 먹고 더욱 빠르게 자란다.

우리는 모두가 성장을 외치는 불편한 시대에 산다. 나 역시 커리어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함 없이 ‘성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항상 성장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성장 그래프는 계단형이다. 매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의 큰 성장, 전문 용어로는 퀀텀 점프를 한다. 나머지 기간은 성장을 위한 준비 기간이다. 이 큰 성장은 마치 곤충들이 더 성장하기 위해 겉껍질을 벗어야 하는 탈피와 같다.

이처럼 직장인에겐 몇 번의 탈피가 필요하다. 그리고 탈피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는 것.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강한 상대를 만나는 건 결코 유쾌하진 않지만, 그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4년 동안 안되던 일을 3개월 만에 달성



강한 상대를 경험하는 것은 스포츠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4년 넘게 같은 테니스 클럽에서 뛰었던 적이 있다. 멤버의 평균 연령이 60세 가까이 될 정도로 어르신들이 많았다. 거의 막내였던 탓에 힘과 스피드로 밀어붙여서 랭킹이 전체 20명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러다 올해 캐나다로 오면서 이곳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는데 평균 연령이 40대 후반 정도로 훨씬 젊은 클럽이었다. 멤버들도 50명이 넘었다. 이전 클럽에서는 나름 잘 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여기선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들이 수두룩했고 워낙 멤버들이 많다 보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활동한 지 세 달 정도 지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4년 넘게 활동했던 테니스 클럽에서 성장했던 것보다 최근 세 달 동안 성장한 속도가 훨씬 빨랐다. 다시 이전 클럽으로 돌아간다면 가장 잘 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강한 상대가 많았고 그분들과 경기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레슨 동영상을 찾아보고, 약점을 보강하고 강점은 더 키우고, 실제로 경기해 보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깨닫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매일 강해지는 것을 느낄 정도다. 실제로 실력에 따라 A, B, C조로 나뉘어 대회를 했는데 B조에서 우승을 차지해 다음 대회 때는 A조의 강한 멤버들과 붙을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

강한 상대는 라이벌과 다르다. 현재 실력으로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상대다. 커리어에서도 라이벌도 좋지만 이처럼 확실히 강한 상대가 필요하다. 이런 상대들과 어떻게 함께 일하고 또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한다.

 



하나, 전설과도 같았던 인생 첫 사수



첫 직장은 어렸을 때 다녔던 초등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중견기업이었다. 그리고 첫 사수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부터 회사에 다녔던 전설적인 여자 부장님이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부장님이 신입 시절 회사 건너편 초등학교를 다녔던 학생이 자라서 본인 밑에서 일을 하게 될 줄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부장님은 여자 직원을 찾아보기 힘든 시절 입사해 모든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차지했다. 여성 최초 과장에 이어 최초 부장까지 20년 가까이 홍보팀 터줏대감으로 생존하면서 회사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인맥도 넓었다. 이런 전설과도 같았던 부장님의 부사수로 입사했으니 주변에서는 염려 아닌 염려를 했다. 특히 부장님은 당시 오랫동안 군기반장 역할을 했다. 직원들의 근태나 복장이 조금이라도 눈에 벗어나면 화장실로 데려가 눈물을 쏙 뺄 정도로 혼쭐을 냈었다고. 그러다 보니 부장님 밑에서 5년 가까이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마크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가 있어요?”

나라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초격차였다. 부장님과 내 사이의 격차가 너무도 컸다.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부장님의 20년 경험에서 비롯된 노하우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실’보다 ‘득’이 절대적으로 많은 관계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워야 하는 부분을 최대한 배우고자 노력했다. 돌아보면 두 가지 스킬을 배웠는데 하나는 글쓰기였고 다른 하나는 조직 안에서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글쓰기를 하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버틸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부장님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년의 세월은 부장님에게 경력을 선물했으나 너무나도 보수적인 회사에 어린 나이에 들어와 40대가 넘어서 까지 다니다 보니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는 것에는 많이 느렸다. 그래서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3, 4년 차부터는 이 부분에 대해서 부장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적인 부분을 디지털로 바꿨고, 보여주기 식 업무에 대해서는 설득의 과정을 거쳐 시간을 아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결과로 보여줘야 했기에 스스로도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내가 첫 직장과 첫 사수의 인연은 참으로 감사하고 후회가 없다. 전자공학 출신을 글 쓰는 홍보팀으로 받아준 것, 제대로 된 글을 쓰는 사람으로 키워준 것, 또 원하는 커리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 모두 진심으로 감사하다. 전설과도 같은 사수 덕분에 이후에 만난 또 다른 전설들과도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었다.

 

 

 


둘, 천재 같았던 MBA 동기들



2010년 서른둘의 나이에 일본 MBA를 갔을 때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경험했다. 일본 문화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15개 나라에서 온 50명의 동기들로부터 받은 충격이었다. 나라, 종교, 문화, 언어, 성장 과정이 전혀 다르다 보니 서로의 가치관, 선입견, 그리고 윤리 기준까지도 차이가 났다. MBA 수업이 토론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이를 매일 경험했다. 예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조난을 당해 하산해야 하는 상황에 누군가 부상을 당한 경우에 두고 올 것인지 아니면 함께 내려올 것인가에 대한 윤리를 다루는 케이스 스터디가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동기들이 당연히 부상당한 이를 버려두고 와야 한다고 냉정하게 주장을 펼쳤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이를 고민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MBA 동기들 중에는 천재 같은 어린 동기들이 많았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에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커리어 목표가 뚜렷한 친구들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동기들보다 영어가 약하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케이스를 밤 늦게까지 읽어도 다 못 읽고 가는 나와는 달리 원어민 친구들은 통학하면서 지하철 안에서 다 읽을 정도였으니, 그 모습을 봤을 땐 정말 좌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확실히 천재 같았던 동기들이 있었다. 교육 시스템 차이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생각한 바를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자신감을 가지고 전달하는 모습은 정말 배우고 싶었다. 양보가 미덕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쟁취하려는 커리어의 욕심 역시 배울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똑똑한 친구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배가 산으로 가지 않고 바다로 향하기 위해서, 어떻게 팀워크를 이루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MBA 시절 천재 같았던 동기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통해 내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시야가 넓어졌다. 이 경험 덕분에 이후 외국계 회사를 다니고, 스타트업 임원을 하면서 만난 천재 같은 후배들과 함께 일하고 때로는 그들을 리딩 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덜게 되었다.

 


 

셋, 30대에 외국계 회사 넘버 5가 된 상사



외국계 회사 전략 매니저 시절 대표님을 비롯해 사업부 수장들은 모두 50대 후반이었다. 딱 한 사람 내 직속 상사를 제외하고. 그는 30대에 최연소 이사 승진과 상무 승진을 이뤄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4개 사업부 가운데 하나를 맡아, 굳이 따지면 회사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세가 되었다.

그를 상사로 둔 것은 결과적으론 큰 축복이었다. 직장 생활 동안 가장 밀도 있게 일했던 기간이 컨설팅팀이었다면 가장 생각이 트인 기간은 상무님 밑에서 일했던 시간이었다. 상무님은 한마디로 ‘일잘러’가 되는 방법을 알려줬다. 특히 ‘야근하는 것은 본인이 무능하다는 증거’라며 본인 허락 없이는 야근을 못하게 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을 강조했다. 당연히 업무 시간에 집중하게 됐고, 불필요한 일, 중복되는 일은 모두 없앨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사내에서 힘이 있다 보니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다른 팀과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전화 한 통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게 했다. 심지어는 대표님 허락이 필요하면 바로 대표님 방으로 달려가 문제를 해결해줬다.

물론 빨리 올라간 만큼 주위에 적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00명이나 되는 회사에서 나이로 치면 중간 정도인데 넘버 5가 됐으니 위에서는 견제하고, 아래서는 시기 질투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른 사업부 수장들은 상무님이 어떤 일을 하고 다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오늘 점심은 누구랑 먹었고, 요새 누구하고 같이 붙어 다니는지까지 체크했다. 그럼에도 본인이 떳떳하고 결과로 보여주니 그런 움직임에 개의치 않았다.

이처럼 입지전적(立志傳的)인 보스 밑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건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그와 한 번의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먼저 답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답을 들고 가면 설명 그 답이 100점짜리가 아닌 80점 짜리여도 상무님은 내가 찾은 답으로 진행해보도록 했다. 또한 초고속 승진의 비결 중 하나가 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캐치해서 그것에 집중한 것일 텐데, 상무님 밑에서 전략 매니저로 일하면서 문장과 데이터만 늘어놓는 전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인사이트를 끄집어낼 줄 아는 전략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겐 강한 상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평소에 내가 편하게 생각하고 대화했던 이들 중에 다른 사람들에겐 한없이 강한 상대인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된다면 그들 또한 내가 넘어야 하는, 겪어야 하는 강한 상대가 될 것이다. 내년에 새로운 커리어 방향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는 지금,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확실한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 내게는 또 다른 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Mark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