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UX] 수도꼭지에서 발견하는 UX
하루에도 몇 번씩 틀게 되는 수도물. 집에서나, 여행지 숙소에서나, 우리나라에서든, 외국에서든, 수도물을 틀어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왼쪽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오고, 오른쪽에서는 차가운 물이 나온다.”
(수도 뿐 아니라, 정수기도 이 규칙을 따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이 당연한 규칙은 사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역사와 인간의 행동 패턴이 결합해 탄생한 아주 훌륭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 당연해 보이는 이 규칙, 국제 표준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법적인 국제 표준(ISO)까지는 아니지만, 전 세계 배관 업계의 ‘암묵적인 룰(산업 표준)’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 배관 규정(Uniform Plumbing Code)에는 ‘온수는 반드시 왼쪽에 연결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을 만큼 나름 엄격한 규칙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왼쪽이 뜨거운 물이고 오른쪽이 찬물일까?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UX’가 숨어 있다.
– 오른손잡이의 역사 (Historical Context)
이야기는 19세기 실내 배관 시스템이 처음 도입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술로는 ‘찬물’만 나오는 펌프가 유일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85~90%는 오른손잡이다. 따라서 물을 긷는 힘든 펌프질을 편하게 하도록 배관공들은 당연히 펌프 손잡이를 싱크대 ‘오른쪽’에 설치했다.
시간이 흘러 보일러 기술이 발달하면서 ‘따뜻한 물’이라는 엄청난 신기능이 업데이트되었는데, 이미 오른쪽 명당은 찬물 펌프가 차지하고 있었고, 배관공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당연히 남는 자리인 왼쪽에 온수 파이프를 놓는 것이었다. 즉, 초기 시장을 선점한 ‘찬물(우측)’ 덕분에 ‘따뜻한 물(좌측)’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결정된 셈이다.
– 안전을 위한 UX, “앗 뜨거!” 방지 (Safety First)
기술이 발전하면서 두 개의 파이프가 하나로 합쳐진 ‘싱글 레버(Single-lever) 수도꼭지’가 등장한다. 이때도 ‘왼쪽 온수, 오른쪽 냉수’ 공식은 유지되었는데, 여기엔 아주 강력한 안전 UX가 작용하게 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가장 자주 쓰는 메인 기능을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보통 손을 가볍게 씻거나 컵을 헹굴 때처럼 일상적인 상황에서 찬물(또는 미지근한 물)을 더 자주, 먼저 틀게 된다. 만약 오른쪽이 온수였다면, 무심코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툭 올렸을 때 갑자기 뜨거운 물이 쏟아져 화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자주 쓰고 안전한 ‘냉수’를 접근성이 좋은 오른쪽에 두고, 주의가 필요한 ‘온수’를 왼쪽에 배치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화상 위험을 낮춘 훌륭한 위험 방지(Error Prevention) 설계인 것이다.

– 현대 UX 관점에서의 평가 : ‘멘탈 모델’의 승리
UX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멘탈 모델(Mental Model)’이다. 사용자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제품은 당연히 이렇게 작동하겠지?”라고 예측하는 직관을 뜻하는데, 수도꼭지의 냉온수 방향은 전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 완벽하게 각인된 강력한 멘탈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힙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난 고정관념을 깨겠어! 왼쪽에 찬물을 놓겠어!”라며 반대로 설계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용자는 눈을 비비며 들어간 아침 화장실에서 찬물로 잠을 깨려다 뜨거운 물 벼락을 맞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겉보기엔 혁신적일지 몰라도 사용자에게 극심한 인지 부하(Cognitive Load)와 신체적 고통을 주는 ‘나쁜 UX(Bad UX)’의 전형이 되는 것이다.
오른쪽 찬물, 왼쪽 따뜻한 물은 단순한 배관 법칙이라기 보다는, 오른손잡이 조상님들의 편리함에서 시작해, 우리의 손을 화상으로부터 지켜주는 어찌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직관적인 UX 디자인이라 할 수 있겠다. 국경과 언어가 달라도 전 세계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수도꼭지 속 ‘보이지 않는 손’을 우리는 매일 만나고 있다.
우리 삶 곳곳에 숨겨진 UX 이야기
윈터노트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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