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정부를 세웁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1940년 6월, 영국 런던. 나라가 항복한 뒤 바다를 건너온 한 장군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섭니다. 샤를 드골입니다.

21년의 시차, 멀리 떨어진 두 도시.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낯익습니다.

조국 밖에서는 망명 지도부가 저항의 깃발을 들었고, 점령된 조국 안에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지도부는 강대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애썼고, 군대를 만들어 연합국과 함께 싸우고자 했습니다.

프랑스에도 임시정부가 있었고, 독립군이 있었습니다. 오는 11월 국내 개봉하는 영화 <드골>이 한국 관객에게 유독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프랑스의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의 임시정부와는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달랐는지 살펴봤습니다.

 

 

자유 프랑스, 수도는 파리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자유 프랑스’는 1940년 나치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를 거부하고, 나라 밖에서 전쟁을 이어간 드골과 그 지지자들의 조직입니다.

출발은 초라했습니다. 1940년 6월 28일 영국 총리 처칠이 드골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인정했을 때, 그의 곁에 모인 병력은 한 줌에 불과했습니다. 7월 말까지 영국에서 합류한 병사가 약 7,000명이었죠.

전환점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1940년 8월 26일, 프랑스령 차드의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에 합류를 선언합니다. 아프리카 식민지 가운데 처음이었습니다. 이어 8월 말까지 가봉을 제외한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전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망명 조직에 처음으로 ‘땅’이 생긴 순간이었습니다.

그해 10월, 드골은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자유 프랑스의 통치 기구를 출범시킵니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자유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도 런던도 아닌, 아프리카의 브라자빌이었던 셈이죠.

상징도 만들었습니다. 잔 다르크와 독일에 빼앗긴 로렌 지방을 떠올리게 하는 ‘로렌 십자가’입니다.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에 맞서는 저항의 표식이었습니다. 이후 자유 프랑스는 조금씩 정부의 모습을 갖춰 갑니다.

 

시기 조직
1941년 9월 프랑스 국민위원회 (런던)
1943년 6월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 (알제)
1944년 6월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그리고 1944년 6월, 마침내 이름에 ‘임시정부’가 붙습니다. 연합국의 미국·영국·소련이 이 임시정부를 프랑스의 정식 대표로 인정한 것은 파리가 해방되고도 두 달이 지난 1944년 10월이었습니다.

 


레지스탕스, 점령된 조국 안의 독립군

자유 프랑스가 나라 밖의 저항이었다면, 나라 안에는 ‘레지스탕스’가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본토에서 지하신문을 찍고, 정보를 빼돌리고, 철도를 끊고, 무기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시작을 알린 장면 중 하나가 1940년 11월 11일입니다. 점령된 파리에서 학생 수천 명이 금지를 무릅쓰고 개선문으로 행진했죠. 영화 <드골>이 실제 개선문 광장을 통째로 비우고 재현한 바로 그 장면입니다. (→ 영화 찍으려고 파리 개선문 광장까지 통째로 비웠다고?)

 

 

흩어진 저항을 하나로, 장 물랭

문제는 레지스탕스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정치 성향도, 지역도, 방식도 제각각인 조직들이 따로 움직였죠.

이들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 장 물랭입니다. 프랑스 최연소 도지사 출신인 그는 1942년 1월 1일, 드골의 임무를 받고 낙하산을 타고 프랑스 남부에 내려앉습니다. 암호명은 ‘렉스’와 ‘막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1943년 5월 27일, 점령된 파리 한복판에서 주요 저항 조직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의 첫 회의였습니다. 나라 밖의 드골과 나라 안의 레지스탕스가 하나의 저항으로 이어진 순간이었죠.

하지만 물랭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한 달도 되지 않은 6월 21일 리옹 근교에서 체포됐고, 게슈타포의 고문 끝에 그해 7월 숨을 거둡니다. 1964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 위인들이 잠든 팡테옹으로 옮겨졌습니다. 영화에서는 배우 펠릭스 키실이 장 물랭을 연기합니다.

 

 

<암살>의 프랑스판, 스무 살 청년 페르낭

1편에는 또 한 명의 실존 인물이 등장합니다. 페르낭 보니에 드 라 샤펠입니다.

1940년 11월 11일 개선문 행진에 참가했던 이 청년은, 2년 뒤인 1942년 12월 24일 알제에서 비시 정부의 2인자였던 다를랑 제독을 저격합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틀 뒤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죠.

작품소개서는 이 이야기를 ‘<암살>의 프랑스판’이라고 소개합니다. 독일과의 협력을 이끌었던 권력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젊은이의 선택이, 우리 독립운동사의 의열 투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종전 뒤인 1945년 12월, 알제 항소법원은 그의 행동이 “프랑스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판결했습니다.

 

 

닮은 점과 다른 점, 임시정부와 나란히 보기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추격을 피해 항저우, 창사, 류저우 등을 거쳐 충칭까지 옮겨 다니며 광복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40년 9월에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1941년 12월에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나라 밖의 정부가 군대를 만들어 연합국과 함께 싸우려 한 것이죠.

이름에 담긴 뜻도 닮았습니다. 임시정부가 처음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해방을 앞두고 세운 정부의 이름을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두 역사가 걸어간 길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자유 프랑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작 1940년 런던 1919년 상하이
활동 기간 약 4년 약 26년
강대국의 인정 1940년 영국이 드골을 지도자로 인정, 1944년 10월 연합국이 정부로 인정 연합국의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함
영토 아프리카 식민지 등 실제로 통치한 지역이 있음 통치한 영토 없음
군대 북아프리카 등 주요 전선에서 직접 싸움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함
종전 뒤 승전국으로 독일 점령 지역을 맡음 미군정이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

 

자유 프랑스는 1940년 이전까지 강대국이었던 나라의 망명 조직이었고, 해방된 뒤에는 승전국의 자리에 섰습니다. 반면 임시정부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26년 넘게 정부의 명맥을 이어가야 했고, 광복 뒤에도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같은 저항이라도, 그 저항이 놓인 자리는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두 역사가 공유하는 질문은 같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그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가.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을 지켜냈는가.

공교롭게도 2026년은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자, 한국과 프랑스가 수교한 지 1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작품소개서가 <드골>을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에 만나는 또 하나의 저항’이라고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낯선 나라의 역사, 익숙한 저항의 얼굴

영화 <드골>은 이 두 갈래의 저항을 함께 따라갑니다.

런던에서 마이크를 잡은 드골과 사막에서 싸운 자유 프랑스군이 나라 밖의 저항이라면, 개선문으로 행진한 학생들과 장 물랭, 스무 살 페르낭은 나라 안의 저항입니다. 작품소개서의 시놉시스도 이렇게 끝납니다.

“의지할 곳 없는 싸움에 그들은 스스로 뛰어든다.”

드골 한 사람의 영웅담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국 관객에게는 낯선 나라의 역사이면서도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는 영화가 될 겁니다.

<드골: 저항의 시작>은 11월 11일, <드골2: 자유의 시대>는 11월 25일 차례로 개봉합니다. 1편 개봉일인 11월 11일은 1940년 파리의 학생들이 개선문으로 행진한 날이기도 합니다. 드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다면 해당 아티클을 함께 읽어보세요!

 

자료 및 이미지 제공: ㈜모비데이즈 배급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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