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로우로우’라는 브랜드의 캐리어를 하나 샀습니다. 저는 소비를 하고 난 뒤 제가 어떤 경로를 거쳐 결제까지 했는지 리뷰해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마케터 일을 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죠. 당시 캐리어를 구매한 후에도 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어쩌다가 이걸 사게 됐지?’

 

당장 여행을 떠날 것도 아닌 저에게 몇 십만 원짜리 캐리어를 판매한 건 화려한 브랜드 캠페인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SNS 광고도 아니었습니다. 아는 지인이 공유해 준 한 편의 ‘글’이었습니다. ‘이거 좀 봐 봐’라며 보내준 그 글을 보고 저는 처음 알게 된 이 브랜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글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지인이 보내준 글입니다. 오랜만에 찾아봤는데 다행히 아직 남아있네요. 

https://m.blog.naver.com/rawrow/221448342747

 
 

처음엔 브랜드 블로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개인 블로그라고 생각했죠. 정제된 글이라기 보단 날것(raw) 그대로의 글에 가까웠거든요. 

 

브랜드 블로그임을 알고 난 뒤에도 저는 이 글에서 기업이 아닌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면서 해왔던 고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담백하게 적고 있었습니다. 제품의 소구점을 줄줄이 나열했다면 아마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글을 다 읽고 브랜드 이름을 검색해 봤습니다. 웹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고, 인스타도 구경했습니다. 바로 구매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몇 주 흐른 뒤에도 캐리어의 이미지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어차피 캐리어는 사두면 무조건 쓰니까’라며 혼자 구매할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고객이 합리화를 시작했다는 건 결제가 임박했음을 뜻합니다. 결국 이 캐리어는 제 집으로 오게 됐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이야기에 반응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사람’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훌륭한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제작한 축구 다큐멘터리 [ALL OR NOTHING]은 세계적인 축구클럽들의 뒷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라커룸에서 감독이 선수들에게 하는 동기부여, 선수들 개개인이 경기를 뛰기 전후에 느꼈던 감정, 팀 내부의 갈등과 그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까지. 많은 시청자들이 축구 경기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광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영상을 계기로 그 클럽의 팬이 됐고, 기존 팬들은 클럽에 더 강한 애정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원래 아스날 팬이었는데, 이걸 보고 더 열정적인 팬이 되었습니다. (출처 : Amazone Prime 유튜브)

 

 

2021년 토스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브랜드 캠페인 영상을 발표합니다. 이 영상은 금융을 쉽게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표님과 임직원들이 등장해 인터뷰를 하는 형식의 콘텐츠입니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유튜브 환경에서 시청하기에는 다소 지루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이 47분짜리 영상은 조회수 125만 회를 기록했습니다. 이 영상을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토스라는 서비스를 생각할 때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떠올릴 겁니다. 서비스가 파란색 앱 아이콘으로만 존재할 때보다는 훨씬 친근하게 느끼지 않을까요?

 

 

인터뷰에 등장한 토스의 대표님 (출처 : 토스 유튜브 캡처)

 

 


 

 

작은 브랜드의 사람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훌륭한 콘텐츠입니다

 

이미 유명한 브랜드만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골라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시야를 넓혀주는 독특한 관점, 내가 잘 몰랐던 분야의 흥미로운 지식, 긴 시간 몰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한 개인의 통찰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죠.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훌륭한 스토리 소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너무 익숙한 소재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죠. 특정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인 스타트업 팀은 누구보다 그 시장과 고객에 대해 깊게 몰입하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브랜드를 운영하고 계신 분들 역시 누군가에게는 한 분야의 전문가이자 흥미로운 도전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아직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매출이 크지 않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기업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들려주세요. 이 이야기들이 쌓이면 그 자체로 훌륭한 마케팅 콘텐츠가 됩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데 반드시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알맹이가 단단하면 형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인스타에 이미지 한 장과 짧은 생각을 올리는 것으로도 충분하죠. 

 

  • 제품 개발 프로세스, 도움을 주셨던 분들, 함께 고생한 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특정 시장을 관찰하면서 가지게 된 문제의식을 쉬운 언어로 세상에 알려보세요. 
  • 데이터를 많이 다룬다면, 그 데이터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가공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보세요. 
  • 제조, 웹 개발, 마케팅 등 일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극복한 과정을 기록해 보세요. 

 

처음부터 거창한 무언가를 기획해서 만들려고 하면 그 자체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초기에는 아무도 안 봅니다. 일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그날의 업무를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세요. 매일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평범한 하루는 그 자체로 좋은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꼭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어도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습관이죠.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콘텐츠를 보고 브랜드에 호감을 갖게 된다면, 더 나아가 브랜드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된다면 이보다 가성비 좋은 마케팅이 또 있을까요?  

 


박상훈 (플랜브로)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