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의 과반 이상을 점유하는 반도체 강국이었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등 글로벌 경제 위기의 대두로 인해 지속 가능한 경제 실현을 고민하던 일본 정부는 미래 먹거리로 반도체를 선정합니다.

정부 주도 아래 일본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제조 – 설비 – 소재 및 웨이퍼 업체 등으로 체계적인 수직 계열화를 이룰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은 융성하기 시작합니다.

1985년에는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던 미국의 반도체 제조업을 누르고 점유율을 역전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산업 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반도체 사이클이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악성 재고가 쌓이게 되었고 미국보다 경쟁우위에 있었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 반도체 업체들을 상대로 치킨게임을 벌이기에 이릅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일본 반도체에 대한 반덤핑 관세와 각종 무역 제재를 가하게 되어 일본 반도체 업계는 일대 위기에 처합니다. 결국 일본은 일본 내의 미국 반도체 점유율을 20%로 높여주고 미국의 대 일본 반도체 직접 투자를 허용을 골자로 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몰락 일로를 걷게 되었고 그 수혜를 우리 한국이 받으면서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의 원인은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이 미국을 압도하면서 미국의 반도체 산업이 침체되는 것을 막고 반도체 패권을 미국으로 귀속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미일 반도체 협정 이전 일어났던 치킨게임의 결과 버티지 못한 인텔이 메모리 사업에서 퇴출되는 등 미국의 타격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메모리 반도체를 둘러싼 미일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의 수혜국은 한국이 되었습니다. 삼성과 현대반도체를 중심으로 메모리 경쟁력을 쌓아오던 한국은 무주공산이 된 메모리 시장의 신흥 강자로 자리 잡았고 곧 세계의 정상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모리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넘사벽이 되었습니다.

 

 

비메모리 절대 강자 미국
메모리 절대 강자 한국
파운드리 절대 강자 대만

 

미일 반도체 협정의 결과 일본의 메모리 사업이 붕괴되었고, 미국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실적이 요동치는 메모리 쪽 보다는 앞으로 무한한 시장 확장성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 비메모리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1980년 후반 인텔이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했고, 비메모리인 PC와 노트북의 CPU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1993년 우리가 잘 아는 엔비디아가 설립되었고, 1969년 설립된 AMD도 인텔 호환 CPU와 호환이 가능한 CPU를 생산하다가 1990년대 초반 인텔과의 라이선스 소송 이후 1995년 자사만의 프로세서인 K5를 출시합니다. 이 외에도 이후 미국은 퀄컴, 브로드컴, 자일링스, 알테라 등 비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의 맹주로 떠오릅니다.

반면 미일 반도체 협정의 여파로 무주공산이 된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는 한국이 맹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삼성전자와 LG반도체 (현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업체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고사 직전의 일본 반도체 산업을 위협합니다. 이후 삼성전자의 거의 독주에 가까운 기술개발 행보와 놀라운 양산 능력으로 이내 세계 1위를 석권하더니 지금까지 그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 시장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메모리의 절대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도체 강자가 1980년대 후반 등장합니다. 미국 내에 메모리 사업이 침체되면서 미국의 관심은 비메모리 반도체에 집중됩니다. 그러면서 각종 반도체를 연구 개발하는 업체들이 우후죽순 일어납니다. 하지만 설계 기술력이 있을 뿐 그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여되는 반도체 공장을 지을 힘이 없어 자신들이 설계하고 개발한 반도체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빈틈을 대만에서 파고듭니다. 바로 TSMC를 필두로 하는 반도체 위탁 생산 산업에 뛰어든 것이죠. 미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인 팹리스들로부터 반도체의 설계도를 인수받아 맞춤 생산해 주는 파운드리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반도체 파운드리로 반도체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대만은 파운드리의 최강자가 되어 지금까지 절대적 맹주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삼각 구도의 붕괴 ‘자동차 반도체 품귀 현상’

하지만 이러한 반도체 업계의 삼각 구도는 최근에 일어나는 일대 현상으로 인해 변화의 조짐을 맞고 있습니다. 여러 시장 상황에 의해 발생한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바로 그 이유인데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과 IT, 서버용 반도체의 품귀현상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코로나 19 팬데믹 장기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코로나 19가 중국 내 전염병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코로나 19가 준 충격은 전 세계를 강타했고, 이 충격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업 중 하나는 자동차 산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자동차의 수요가 급감한 것이죠. 이에 따라 완성차 업계는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차량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발주도 함께 줄였습니다.

그리고 강제 집콕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게임, OTT, 재택근무 등 IT기기를 활용한 활동에 탐닉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IT기기 매출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데이터 사용량 또한 급증하면서 데이터센터 수요가 증대됩니다. OTT 기업을 중심으로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반도체 기업들은 IT기기와 서버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차량용 반도체 생산 라인을 IT 및 서버 반도체 라인으로 전환하여 수요에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보복 소비에 나섭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현상과 맞물려 전기차 시장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침체되었던 자동차 사업이 빠르게 회복국면에 이르게 되고 전기차 시장의 만개로 인해 한 대의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의 수량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면서 차량용 반도체의 수요가 폭등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미 차량용 반도체 생산 라인을 IT기기 및 서버 반도체 생산라인으로 전환한 반도체 파운드리들은 폭발하기 시작한 자동차 반도체 수요에 유기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반도체의 생산량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여 현재의 품귀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19 팬데믹 창궐로 인해 늦춰졌던 5G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투자가 서서히 재개되면서 관련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기지국 통신칩부터 시작하여 5G 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휴대폰 AP의 수요 또한 폭증했습니다. 게다가 자율주행이 대두되면서 AI칩 수요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반도체의 수요가 폭발하는 그야말로 슈퍼사이클이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칩, AP, 인공지능 반도체 등은 초미세 공정을 활용하여 초 고성능을 지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반도체 회사는 지구 상에 TSMC와 삼성 두 곳뿐입니다. 두 회사는 모두 5 나노 양산을 구현했고 이제 3 나노 양산을 바라보며 직진 중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종 첨단 반도체 수요가 두 회사에게 집중되는 상황입니다.

TSMC도 삼성도 현재 풀케파로 쉬지 않고 공장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폭증하는 신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케파가 턱없이 부족하죠. 이러한 세계 반도체 시장의 변화는 점점 반도체 품귀 사태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 자연재해가 불러온 품귀현상의 심화

그런데 지난 1월과 2월 전 세계 반도체 품귀 현상에 불을 지피는 여러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동아시아의 대표 반도체 생산 업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일단 대만의 ABF 기판 전문업체인 유니 마이크론에서 지난 2월 5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특히나 이 공장은 지난해 10월에도 화재가 있었던 공장이었습니다. 연속된 화재로 인해 기판 생산 라인이 전소되었고 이를 복귀하여 생산을 정상화하는 데에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대만은 약 13~15%의 글로벌 ABF 기판 물량을 소화하고 있고 유니 마이크론은 그중 대표 업체 격입니다. 즉 유니 마이크론 화재로 인해 ABF 기판을 사용하는 GPU나 CPU 제조사들의 생산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GPU 전문 기업 엔비디아, CPU 전문기업 인텔 등의 반도체 공룡들이 포진하고 있어 당분간 PC용 CPU와 외장 GPU의 품귀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반도체 생산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지난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세계 3위 자동차용 반도체 전문 생산업체인 르네사스 테크놀로지의 반도체 공장이 셧다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생산 차질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제2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는 오스틴 시가 속한 텍사스 지역에 기록적인 폭설과 함께 때 아닌 한파까지 겹치는 바람에 전력난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이 셧다운 되었습니다. 또한 오스틴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NXP, 인피니온 등 자동차 반도체 전문 생산업체들의 공장 또한 셧다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전력난이 언제 정상화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현재 공장은 셧다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매우 짧은 텀으로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터진 천재지변으로 인해 차량용 반도체를 포함한 반도체 생산 역량이 타격을 입어 당초 올해 말에는 해소될 것으로 여겼던 반도체 품귀 현상은 더욱 오래 지속될 예정입니다.

 

현 상황이 불러온 반도체 내셔널리즘의 부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들의 경우 동아시아의 대표 반도체 생산 국가인 대만과 한국의 상황으로 인해 자국 산업들이 영향을 받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반도체 생산을 동아시아의 대만과 한국에게 몰아주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반도체 내셔널리즘의 심화입니다.

포문은 유럽연합이 먼저 열었습니다. 유럽 연합은 62조 원을 투입하여 유럽 내 반도체 생산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더 이상 삼성이나 TSMC 같은 동아시아 반도체 회사들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반도체 고립주의 선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러한 유럽의 반도체 독립 움직임은 미국을 자극시키는 것 같습니다.

EU가 움직이자 미국도 발걸음을 재촉하는 눈치입니다. 미국 백악관은 최근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을 시작으로 반도체 산업 전체 공급망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행정명령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의중을 드러냈습니다.

이른바 미일 반도체 협정의 망령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드는 상황입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이 일본 반도체를 찍어 누르기 위한 미국의 위력 과시였다면 이번 미국의 행정명령 고려 발언의 저의에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동아시아 지역에 집중시킨 결과 벌어진 현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인해 자국의 산업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도체 내셔널리즘의 심화는 TSMC와 삼성으로 대변되는 반도체 생산 업체에게 운명을 건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직접투자를 통해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것인가? 아니면 현 체제를 유지하다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눌려 시들어버린 일본 반도체 산업의 전철을 반복할 것인가.

상황은 미일 반도체 협정 때와 비슷합니다. 파운드리 업계에서 점유율 50%를 넘게 잠식하고 있는 TSMC, 그리고 그 뒤를 바쁘게 쫓아가는 삼성,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치면 동아시아 대표 파운드리의 점유율은 70%가 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생산 로드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미국의 대표 반도체 업체들, 그리고 반도체 업계의 패권을 가져오기 위한 강대국들의 실력 과시….. 모든 상황들이 미일 반도체 협정의 데자뷔를 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려다가 사단을 치렀다는 점, 일본이 과점적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미국에도 대항할 만한 반도체 업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등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파운드리에 대한 과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이 치킨게임을 통해 의도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반도체 업계를 고사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 현재의 반도체 품귀 현상을 해소할 만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단기간에 삼성과 TSMC의 기술력을 따라잡을만한 다크호스가 유럽과 미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다르죠.

그래서 강대국들은 삼성과 TSMC의 현지 생산 공장을 유치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반도체 시장의 앞날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강성모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