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201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브붸’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네슬레 본사에서 다른 국가에서 온 담당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 때였다. 5월인데도 불구하고 제네바 호수 건너 위치한 알프스 산맥은 하얀 눈으로 쌓여있었다. 내 앞에 펼쳐진 배경 화면을 좌우 측두엽에 위치한 기억 저장고에 열심히 담고 있는데 이러한 평화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8시 45분이야. 우리 이러다가 9시 미팅에 늦는 거 아냐?”

그녀의 말에 나를 포함한 스위스 본사 첫 방문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긋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인도에서 온 Vinay가 느긋한 톤으로 말했다.

“그거 알아? 스위스 사람들은 시간을 지키는 데 상상 이상으로 집착해. 지금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2분 후에 트램이 도착할 거야.”

 

 

Vevey Tram / 사진=Bernmobil

 

 

그의 말을 흘려듣기에는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강한 확신을 보였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2분 후 트램이 정차하였다. 이것이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스위스의 시간에 대한 집착이자 철학이다.

이러한 스위스인들의 시간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시계로 이어졌다. 어쩌면 많은 시계 브랜드 특히 세계 3대 명품 시계로 뽑히는 파텍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가 모두 스위스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국민성으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닐까? 시간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빚어낸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하는 ‘파텍필립’을 소개하고자 한다.

 

 

폴란드 전쟁 난민, 시계에 흠뻑 빠지다

 

때는 1812년 폴란드의 한 귀족 가문에서 앙투안느 드 파텍이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6살이 되던 해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항한 무장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군에 입대하여 1830년 11월 봉기에 참전했다. 소년은 단순히 참전에 그치지 않고 고국으로부터 최고의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폴란드군은 러시아 주둔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파텍과 그의 전우들은 서유럽으로 강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파텍은 파리에 정착하였지만 프랑스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압박으로 파텍을 비롯한 이민자들은 다시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파텍은 스위스의 제네바로 옮겼는데 이 결정이 그의 인생은 물론 시계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당시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앙투안느 드 파텍/출처=Your Watch Hub

 

 

그렇게 정착한 제네바에서 그는 시계 제조 장인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보헤미아 출신 폴란드인 시계 장인 프랑수아 차페크를 만나게 된다. 차페크의 시계 제조에 관한 기술에 감탄한 파텍은 제안을 한다.

“차페크, 당신과 함께 제네바에서 제일가는 시계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어때요?”

1839년 5월 그렇게 시계에 대한 공통 관심사를 가진 둘은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서 파텍 차펙 상회(Patek, Czapek & Cie.)를 차리게 된다.

 

 

파텍과 필립의 만남

 

파텍 차펙 상회는 시작과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될수록 둘의 의견 차이는 벌어졌고 결국 둘은 6년의 계약이 끝나자 1845년 4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실력 있는 시계 장인 차페크가 떠났지만, 파텍은 시계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일년 전 파리에서 열린 산업엑스포에서 만난 또 다른 시계 장인 장 아드리앙 필립이 떠올랐다.

 

 

장 아드리앙 필립/출처=Your Watch Hub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기 위해서는 전용 열쇠를 넣고 돌려야 했는데 필립은 크라운(용두)을 고안하여 키 없이도 감을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로 파리의 산업엑스포에서 골드메달을 수상했다. 파텍은 그에게 제안한다.

“필립, 당신과 같이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시계 장인과 함께 세상에 없는 시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나와 함께 해주지 않겠소?”

그의 적극적인 제안에 필립은 곧장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건너가 합류하게 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가진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파텍의 모습에서 천재 개발가 스티브 워즈니악을 섭외한 스티브 잡스가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필립이 크라운을 개발한 덕분에 태엽을 감기 위한 키가 필요 없어졌다.

 

 

그렇게 1845년 5월 세워진 시계 회사가 바로 파텍상회(Patek & Cie.)이다. 오잉? 뭔가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브랜드명은 ‘파텍필립’인데 ‘파텍’밖에 없다. 사실 사업 초기에는 파텍상회로 6년간 운영되었다. 하지만 필립이 핵심 기술자였던 만큼 필립은 자신의 이름 역시 회사명에 포함되기를 요구했다.

“파텍,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서 나의 역할이 상당히 큰데 내 이름이 회사명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소. 내 이름을 당장 회사명에 포함시켜주시오!”

“필립, 회사명을 변경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곧 변경될 테니 기다려주시오.”

필립은 우선 기다려보기로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런던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앞두고 필립은 최후통첩을 전한다.

“파텍,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런던에서 열리는 전시회까지 사명이 변경되지 않으면 난 떠나겠소.”

파텍은 필립의 요구를 더는 미룰 수 없었고 1851년 드디어 필립의 이름이 사명에 포함된다.

 

 

파텍필립으로 변경된 회사명/출처=Collectability

 

 

런던 전시회에서 한 여성 고객이 파텍필립 상회의 펜던트형 시계를 구매하였는데 그녀는 바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렇게 파텍필립은 왕족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소유하고 싶은 시계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구매한 팬던트 시계/출처=Quill&Pad

 

 

파텍필립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세대교체

 

1875년 파텍은 빈혈이 점점 심해지고 건강이 이전 같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혹여라도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룬 기업이 위태로워질까 두려웠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당시 싱그리아, 쾬을 포함한 3명의 직원은 유상증자에 참여하며 기업의 공동소유자가 되었다. 1877년 파텍필립 상회의 창업자 앙투안느 드 파텍은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에겐 20살의 외동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회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평생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회사 운영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였다. 덕분에 이후 50년 동안 70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았다.

파텍의 빈자리는 장 아드리앙 필립의 사위인 앙트안 베나시 필립이 대신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앙트안 베나시 필립이 자신의 아이들이 파텍필립 상회의 적통임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여섯 아이의 성을 자신의 성이 아닌 아내의 성을 따르게 했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이 되자 파텍과 필립 두 가문의 후손 중 파텍필립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다른 창업가 장 아드리앙 필립 역시 세월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는 작고하기 2년 전 그의 막내아들 조셉 에밀 필립에게 그의 자리를 물려준다. 같은 해 쾬은 회사를 떠났고 싱그리아 역시 자신의 지분을 반납하였다. 상회라는 조직의 특성상 계약 기간이 만료하면 자연스럽게 해산될 수 있는 구조여서 파텍차텍 상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필립은 회사를 주식회사로 변경한다. 이후 회사는 거듭하여 신제품을 발표하며 순조로운 성장을 이어갔지만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다.

 

 

스턴 가문의 등장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전 세계에 퍼지자 기존의 거래처들이 구매대금에 대한 지급의무를 지키지 못했고 파텍필립은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경영진은 경쟁사에 인해 인수되어 브랜드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는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장 스턴(좌)과 찰스 스턴(우)/출처=Patek.com

 

 

이때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 바로 스턴 가문의 찰스 스턴과 장 스턴 형제였다. 스턴 가문은 파텍필립에 시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얼을 오랜 기간 단독 납품한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었다. 평소 파텍필립이 제조하는 제품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던 스턴 가문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세기의 시계 브랜드가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파텍과 필립이 빠진 파텍필립을 스턴가가 소유하게 되었다. 찰스 스턴과 장 스턴은 시계의 다이얼을 제작할 때는 의견이 불일치된 적 없었는데, 파텍필립의 지향점을 정하는 데는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결국, 찰스 스턴은 파텍필립의 이사회장으로 취임 후 파텍필립의 운영은 당시 존경받는 시계 장인인 장 피스터를 또 다른 시계 브랜드 Tavannes 로부터 영입하여 그가 1958년 은퇴할 때까지 맡겼다.

 

 

앙리 스턴(좌)과 장 피스터(우)/출처=lgt.com

 

 

찰스 스턴의 아들 앙리 스턴은 1946년 뉴욕에 앙리 스턴 왓치 에이젼시를 세우고 파텍필립의 미국 시장 총판을 담당하였다. 장 피스터가 은퇴하자 파텍필립의 이사회장이자 대표로 취임하였다. 찰스 스턴은 독특하고 희귀한 시계에 관심이 많아 수집하였는데 그의 수집품들은 나중에 제네바에 파텍필립 박물관이 세워지는데 기반이 되었다. 그에겐 스무 살을 갓 넘긴 아들 필립 스턴이 있었다. 필립 스턴은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며 가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IT에도 관심이 많았다. 실제 IT업계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설득이 있었는지 20대 중반의 나이에 아버지가 뉴욕에 세운 앙리 스턴 왓치 에이젼시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앙리 스턴(좌)과 필립 스턴(우)/출처=Europastar

 

 

3년 후 1966년에 제네바에 있는 파텍필립 본사에 합류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시계 제조과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다. 1970년대 들어서며 태엽 구동 대신 전지로 작동하는 전자식 시계인 쿼츠 시계가 가격이 폭락하며 시장에서 대세로 떠오르자 필립 스턴은 당시 자신과 같이 젊은 세대를 위한 시계 제작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The Nautilus Ref. 3700/1/출처=Patek.com

 

 

스포츠광이었던 그는 기존의 품격 있는 파텍필립 시계에 캐주얼함을 입히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시계가 The Nautilus Ref. 3700/1이다. 당시 슬로건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는 스틸로 만들어진다“였다. 1976년 출시와 함께 당시 시장에서 무척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고 현재까지도 고전적이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파텍필립의 시계로 뽑힌다.

 

 

The Nautilus Ref. 3700/1/출처=Craft+Tailiored

 

 

이듬해 필립 스턴은 파텍필립의 CEO로 취임하게 된다. 필립 스턴은 더 정확하면서 가격까지 저렴한 쿼츠 시계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더욱 하이엔드 기술을 도입함과 동시에 예술적인 가치 또한 내포하여 수집가들이 소유하고 싶은 시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파텍필립을 한 단계 진일보시키기 위해 엔지니어들을 영입하였다. 기존에는 몇 명의 장인들에 의존한 공정 과정을 조금 더 체계화를 거쳐 표준화하고자 하였다. 같은 부품에 대한 규격화시킬 수 있다면 생산력은 올리고 추후 특정 부품의 교체를 통해 수리가 가능해져 고객으로서는 더욱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시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장인의 수작업이 기계보다 낫다면 수작업을 택하겠다. 하지만 기계가 장인의 작업을 도울 수 있다면 우리는 맹목적으로 전통을 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필립 스턴은 외부 요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회사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 여겼다. 제조과정은 매우 자율적으로 이뤄지며 최소한의 부품만 외부 파트너로부터 조달하였다. 1993년 마침내 앙리 스턴은 회장직을 자기 아들인 필립 스턴에게 넘겼다. 이듬해 필립 스턴의 아들 티에리 스턴 역시 회사에 합류하며 4대째 파텍필립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제네바 도시 안에 파텍필립의 작업 공간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공장을 새로 설립하며 제조공정이 한 곳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이때가 1996년이었는데 필립 스턴이 대표가 된 지 20년이 된 시기였다. 그 와중에 직원들은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었다.

 

 

파텍필립의 유명한 슬로건이 담긴 광고

 

 

1996년은 공장 설립 이외에도 기념비적인 일이 또 하나 있다. 파텍필립의 너무나도 유명한 슬로건인 “파텍필립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두는 것이다“가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다. 2001년 필립 스턴은 그의 아버지 때부터 오랜 기간 준비하였던 파텍필립 박물관을 드디어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40년 동안 수집한 수천 개의 희귀하고 시대의 변화를 담은 시계들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파텍필립 박물관/출처=Patek.com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계의 혁신이 파텍필립 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파텍필립 어드밴스드 리서치(Advanced Research) 부서를 설립하고 파텍필립만의 독자적이고 진보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2005년 어드밴스 리서치의 첫 작품인 애뉴얼 캘린더 5250에 적용된 실리콘 기반의 부품이 들어갔는데 당시 아주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되었다.

 

 

애뉴얼 캘린더 5250/출처=Patek.com

 

 

이 부품은 가벼우면서 밀도는 강철의 1/3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관성이 낮아 에너지 소모가 적다. 또한, 강철보다 단단하고 내마모성이 뛰어나고 비자성 및 자기장에 둔감하다. 이외 충격에 강하고 신축성이 있어서 뒤틀림이 있어도 자가복구가 가능하니 이보다 더 좋은 재료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파텍필립은 이후 출시된 애뉴얼 캘린더 5350에서는 해당 부품을 밸런스 스프링에도 적용하는 등 점차 활용도를 높여 에너지 효율은 높이고 오버홀(정비) 주기는 늘릴 수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약하다

 

필립 스턴의 아들 티에리 스턴은 1994년 회사에 합류 후 시계 제조업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파텍필립의 모든 부서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후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시장을 담당한 다음에는 파텍필립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으며 파텍필립의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2009년 필립 스턴의 아들 티에리 스턴은 아버지 필립 스턴을 이어 파텍필립의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필립 스턴(좌)과 티에리 스턴(우)/출처=FHH JOURNAL

 

 

이후 파텍필립은 또 다른 모험을 강행하는데 바로 제네바 인증으로부터 독립이었다. 제네바 인증은 스위스 제네바 주 정부에 의해 1886년 법으로 제정되었는데 제네바에 기반을 둔 시계 제조사들이 만든 시계의 공식적인 품질 보증을 책임진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당시 많은 시계 제조사들이 제네바를 떠나 시계 제조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제네바 주 정부의 의도가 담겨있다. 그런데 파텍필립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네바 인증조차 파텍필립의 오랜 전통과 혁신적인 기술력을 대변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파텍필립 자체 인증을 만들었다. 파텍필립이라는 브랜드를 정의하는 상당히 대담하면서도 상징적인 조치로 여겨진다.

 

 

파텍필립의 자체 인증/출처=Monochrome Warches

 

 

파텍필립이라는 기업을 시계 제조사로만 한정 짓기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보여준 기술혁신이 눈부시다. 한 분야에서 저렇게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그 분야의 미래를 직접 그려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티에리 스턴이 남긴 말과 함께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열정이 있고 좋은 사람들로 구성된 기업은 쉽게 무너질 수 없습니다. 파텍필립은 창조와 혁신의 끝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더 나은 시계를 위한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날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시계의 설계는 더욱더 세밀해지고 복잡해지겠지만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을 현실이 되게 할 것입니다. 파텍필립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창조와 혁신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해당 콘텐츠는 Jimmy Cho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