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 조직의 CEO상

 

CEO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위계 조직에서는 가장 위계가 높은 사람으로서 회사 내에 거의 모든 결정을 담당한다. 어떠한 결정도 CEO가 반대하면 취소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최종 책임을 진다. 회사는 잘 되면 그의 덕이고 잘못되면 그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다. 그의 책임 있는 결정으로 직원들은 그의 결정을 믿고 따라야 한다. 

위계 조직에서 CEO는 종종 신격화되곤 한다. 위의 명령을 빠르게 수행하는 위계 조직에서 그의 결정사항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명령체계가 와해되고, 조직 자체가 와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결정은 믿고 따를 만한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잘못된 결정이어도 ‘지금은 모르지만 미래에는 옳은 결정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미래를 보는 CEO의 혜안이라고 하곤 한다. 조직의 명령체계를 흔드는 것보다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금의 그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위계 조직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위계 조직에서는 회사 전체의 미션보다는 CEO가 하신 말씀과 생각 등이 더 중요하게 인식된다. 심지어 위계 조직에서의 CEO는 종종 엔지니어보다 엔지니어링에 관한  결정을 잘 내리고 디자이너보다 디자인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인식된다.

위계 조직에서 CEO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고 수행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일을 안 하겠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결정권이 없고,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하부 구성원이 CEO의 결정을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 제기는 CEO가 착한 윗사람이어서 들어주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위계 조직에서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들어주었을 경우 CEO의 권위가 손상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가 포용적으로 받아주어서 자신의 의견처럼 활용할 뿐 의견을 낸 사람이 크게 얻을 만한 것은 없다. 반면 그 아이디어를 CEO가 좋아하지 않을 경우, 그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쓸데없이 나대는 사람이 되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상하 간 소통이 중요하지도 않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아래로부터의 소통은 소원 수리, 아이디어 수집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역할 조직의 CEO상

 

역할 조직에서 CEO의 역할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회사를 대표하고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만, 권위를 가진 윗사람이 아니라 경영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회사 동료이다. 

CEO도 기본적으로 회사 전반의 결정을 내리는 일에 특화되어 있는 전문가로 본다. 그가 다른 분야에 전문성이 있지 않은 한, 엔지니어보다 엔지니어를 더 잘하거나, 마케팅 전문가보다 마케팅을 잘하거나. 디자이너보다 디자인을 더 잘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렇게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그는 회사 전반의 중요한 결정사항, 예를 들어 주식 상장을 언제 할 것인가, 향후 사업 확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 어느 사업 분야를 포기할 것인가 등의 결정을 내린다. 그가 제품 디자인과 엔지니어의 결정과 마케팅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은 개인의 의견일 뿐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할 조직의 실리콘밸리 회사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Because the CEO said so’ means nothing.” 

(CEO가 한 말이 전문가인 우리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결정은 내가 한다” vs.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우리나라의 열린 생각을 가졌다고 존경받는 CEO들은 대부분의 경우 ‘착한 갑’이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사람일 뿐, 완전히 동등한 관계에서 전문적인 의견과 결정권을 존중하고, 전문가를 위해 경영적 관점에서 의견을 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디자이너가 멋진 제품을 디자인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위계적인 CEO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그 디자인 별로인데? 다른 좋은 디자인을 다시 가져와 보세요.”

명령권자이자 최종 결정권자로서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다.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서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정도의 전문성도 없다. 대부분 CEO의 감에 의존해서 결정을 내린다.

 

반면 착한 ‘갑’ CEO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멋진 디자인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 디자인은 회사의 전반적인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요즘 시대에 흐름에 맞도록 각진 디자인을 없애고, 좀 더 코너가 둥근 마무리를 가진 쪽으로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봐 주세요.”

그는 디자이너의 노력에 감사하는 말로 시작한다. 자신의 의견이 다른 CEO들과는 다르게 위협이나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좋은 CEO는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디자인의 최종 승인은 그의 권한임은 분명히 한다.

 

역할 조직의 CEO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저는 확 와닿지는 않아요. 제 의견도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각진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제가 디자인 전문가는 아니니까 당신의 전문적 판단력을 믿을게요.” 

디자이너 노력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간단히 말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CEO가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굳이 강조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CEO가 디자이너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디자이너의 매니저에게 이야기해서 디자이너에게 PIP(Performance Improvement Plan, 업무 성과 개선 프로그램)을 하도록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면 3개월여의 프로젝트의 결과에 해고를 결정할 수 있다. CEO가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해고할 경우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대부분 인사팀과 해당 직원의 매니저에게 그 일을 맡긴다. 

CEO에게 디자인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사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그래서 CEO가 자신의 의견을 물어본 것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 된다. 

CEO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겠지만, 디자인의 최종 결정은 디자이너가 한다. 나중에 CEO에게 다시 검사를 받으러 올 필요도 없다. 디자인의 최종 결정권은 디자이너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늘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라고 자기 감으로 결정을 내리고 아무 질문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결정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한 경우에는 왜 근거가 부족한지, 어떠한 점을 감에 의존해서 결정했는지를 사내 문서 시스템인 사내 위키피디아에 정확히 써놓아야 한다(사내 위키피디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Quip, Confluence, Hackpad, Googled Docs 등의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주로 이용한다).

 


 

CEO가 마케터를 뽑는 것은 자신이 마케팅을 더 잘할 수 있는데 귀찮은 것을 맡길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CEO보다 마케팅을 훨씬 잘하고 업계에서도 이미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초빙해서 회사에 더 큰 기여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CEO보다 훨씬 마케팅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놓고 마케팅 캠페인을 시장이 아닌 사장이 선택하는 것은 여러모로 낭비이다.

마케터/디자이너/엔지니어가 시장과 직접 마주하게 되면 창의적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을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지만 CEO를 만족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리면 창의력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위계 조직이 표준화되어 있고 상식의 범위 안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은 제조업에서는 강점을 발휘하지만 시장 상황에 빠르게 변화하는 소프트웨어, 마케팅, 디자인 등에서는 취약한 이유이다.

 

 

유호현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