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절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그녀를 악덕 팀장이라 부른 이유

 

악덕 팀장. 우리는 그녀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팀원들이 입을 모아 C를 ‘악덕 팀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그녀의 신뢰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팀원들을 못 믿어 마이크로 매니징하고 성장할 기회를 박탈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녀는 몇몇 팀원들에게 비수에 꽂히는 말을 하며 그들의 자신감을 깎아내렸다. 들어보니 주로 경력이 낮은 팀원들이 이런 망언의 타깃이 되는 듯했다.

팀원들과의 1:1 면담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팀원에게는 “쉽게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말을, 또 다른 팀원에게는 “다른 회사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실력”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영국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이런 인격 모독 수준의 망언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한 피드백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어떤 점이 부족하고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얘기해주면 되는데, 이런 도움도 안 되고 기분만 상하게 하는 말은 도대체 왜 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녀가 별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들은 이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자신감이 떨어진 팀원들은 매사에 더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이는 그들의 업무 성과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C는 자신이 뽑은 직원과 기존 팀원들을 비교하는 발언도 일삼았다. 새로 온 직원은 기존 팀원들보다 경력이 훨씬 높고 다양한 경험이 많았기에 객관적으로 봐도 배울 점이 많았다. 따라서 그 배울 점을 구체적으로 짚어주며 맥락에 맞게 얘기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꼭 중요한 포인트는 쏙 빼놓고 불쾌한 요소만 가득 담은 비교 발언을 남발했다. “일은 00처럼 해야지”, “아무개 씨는 왜 00처럼 못해?”와 같은 말을 들으면 뭘 어떻게 하라는 지는 알 수 없고 그냥 기분만 상하고 만다. 이런 알맹이 없는 비교가 반복될수록 팀원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새로 온 직원에 대한 괜한 적개심만 갖게 되었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반대로 그녀는 말로 천냥 빚을 지는 타입이었다. 분명 팀장으로서 그녀의 목적이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녀와의 대화는 늘 불쾌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말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태도였다. 우리를 무시하고, 불신하고, 자신감을 깎아내리는 그녀의 태도는 팀원들에게 큰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었다. 이런 악덕 팀장의 만행에 넌덜머리가 날 때쯤 팀원들의 반란은 시작되었다.

 

 

 

 

중이 절을 바꾸려는 시도

 

“다 같이 인사팀에 얘기해 보면 어떨까?”

 

한 팀원이 조심스럽게 반란을 제안했다. 되도록이면 팀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해본 뒤였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C에게 직접 피드백을 줬으나 그녀는 변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고, 나뿐 아니라 다른 팀원도 이미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팀원들은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우리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그녀라도 인사팀의 입을 통해 들으면 쉽게 흘려듣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이 제안을 들었을 땐 이런 시도를 한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회사 생활에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진리인 줄만 알았는데, 중이 절을 바꾸려고 한다니 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이 앞섰지만, 변화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비해 수평적인 문화를 가진 영국 회사인 데다가 여러 방면으로 유동적인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서 변화를 시도하는 동료들을 보며 나도 힘을 보태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단체로 인사팀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게 인사팀과의 단체 회의가 잡혔다. 우리는 돌아가며 각자 겪은 일들과 이를 통해 느낀 점을 얘기했다. 한 동료는 마이크로 매니징에 관한 일화를, 다른 동료는 그녀의 대화법에 관한 일화를 공유했다. “쉽게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말을 들은 동료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다가 애써 참던 눈물을 보였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보다가 나까지 울컥해 버렸다. 각자 경험은 조금씩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이 회의에 임했다. 계속 이런 취급을 받으며 일할 순 없다는 마음. 이 회의는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였다.

 

 

 

결국 절은 바뀌지 않았다

 

인사팀은 우리의 이야기를 취합해 C에게 전달했다. 인사팀의 피드백을 들은 뒤 한동안은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비꼬며 한 마디 했을 부분에서 말을 아끼기도 했고, 팀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본인의 입장만 고집하던 부분에서 의견을 약간씩 굽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성을 드러내며 ‘악덕 팀장’의 모습으로 돌아간 걸 보면, 아마도 우리의 피드백에 깊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저 인사팀의 시선을 의식해 일시적으로 태도를 바꿨던 모양이다.

우리는 참다 못해 또 한 번 인사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계속 변하지 않는 그녀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팀원들이 단체로 괴로움을 호소하는데도 그녀를 이토록 감싸고 도는 회사의 태도가 의아했다. 전 상사를 그렇게 가차 없이 자르던 회사와 같은 곳이 맞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녀의 매니징 방식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회사에서는 마이크로 매니저가 필요했고, C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하는 팀장이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중이 절을 바꾸기도 한다’라는 해피 엔딩을 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중이 절을 바꾸려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절은 바뀌지 않았다’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영국 회사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했다. 결국 팀원 대다수가 퇴사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난 건 나였다. 하지만 결말이 어땠든 끝까지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했던 우리의 시도에 후회는 없다. 이 과정을 통해 이 회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떠난 자는 미련이 없다. 이 회사를 떠나는 나의 마음이 그랬다.

 

 

엄지현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