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제품팀의 조직문화를 진단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까지 했었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해결해야할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이 일에 권위자가 전혀 아니다


겨우 몇 년의 제품 경력을 가진 내가 옳은 진단과 해결을 내놓더라도(그러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셀 단위가 아닌 제품팀 전체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다. 조직문화 진단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했던 것은 권위를 얻는 일이었다.

처음엔 흔히 하는 ‘애자일 코치’ 과정을 수료해서, 외부 전문가의 권위를 이용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애자일’, ‘코치’ 두 단어 모두 우리 회사에서는 부정적 인식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이미 ‘애자일’을 대대적으로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흐지부지해서 좋은 카드를 날려버린 상태였다. 두 달이나 갔을까, 구성원들에게 애자일은 흐지부지의 상징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우리 회사 뿐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에서 그런 것을 보면 참 오해가 많은 단어인 것 같다. 나중에 이 부분도 써봐야겠다)

 

코치.

이 말은 일단 내가 싫어하는데, 제 3자의 느낌이 너무 강하다. 보통의 대기업 HRD 파트처럼 유형 검사정도 해주고 화이팅하는, 실무와 동떨어진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전혀 없기 때문에, 나는 프로덕트를 맡지 않으면서도 소속을 PM group으로 유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어디서도 외부 코치가 개입해서 지속적인 기준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회사는 점진적이더라도 지속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자주 생각을 나누는 동료 한 분이 ‘도니 전에 저한테 권해준 인스파이어드를 가지고 해보시는 것은 어때요?’라며 생각치 못했던 제안을 주셨다.

 

 

제품 관리에 관한 단 한 가지 책만 허락된다면 바로 이 책을 가져야한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이 책을 통해 영감을 얻은 수 많은 실리콘밸리 제품 관리자 중 한 명이 추천사로 남긴 말이다. 인스파이어드(지은이 마틴 세이건)는 제품팀의 역할과 일하는 방법을 다룬 교과서라고 보면된다.

전 회사에서 떠나기 전 ‘다음 회사에서 제품 관리자를 하면 이 책대로 해봐야지’하면서 동경하던 책이고, 그래서 입사하면서 동료들에게 추천하고 다니기까지 했었는데 잊고 있었다. 잠깐 책을 다시 훑어보고 망설임없이 결정했다. 옳은 기준과 권위를 모두 줄 수 있는 책이었다.

기준과 권위를 얻었으니 이제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어떤 내용을 전달할까 고민할 차례다.

 

 

한정된 에너지로 변화를 꾀한다면 먼저 한 줄의 균열부터 내보자


나는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배운 것을 하나 예시로 써먹자면, 아무리 단단한 재료에도 딱 한 줄의 균열(crack)만 생기면 그 부위에 힘이 집중되고 깨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정된 에너지로 뭔가 깨려면 전체 부위에 힘을 가하는게 아니라 작은 부위에 균열을 내는데 집중해야한다. 어쨌든 큰 그림을 가져도 작게 시작하는게 좋다는 말이었다. (TMI. 재료의 전체 부위에 힘을 가하면 피로(fatigue)가 쌓이게 되는데, 이런 재료의 피로는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니까 항상 대대적으로 조직 전체에 변화를 선포하고 얼마 못가 흐지부지 되기 쉬운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전체 제품팀을 변화시키는게 목표지만, 나는 한 명이고 야근도 많이 하지는 않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 대상은 같이 일하는 제품 관리자 분들로 한정했다. 제품 관리자는 셀의 일하는 방식과 동기부여의 주축이며 경영진과 가장 맞닿아 있고 불만도 많으니 적절한 대상이기도 하다.

방법은 스터디? 워크샵?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소그룹 논의하는 형태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인스파이어드에 나오는 최고 기업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1)잘하고 있는 것 2)부족하고, 어려운 것 3)시도해보고 싶은 것 정도의 프레임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아무리 좋은 기준이라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으면 공감이 안된다. 우리가 직접 되새긴 것을 경영진에 건강한 제언으로 전달해 보려고 한다.

 

 

도달해야할 결론을 먼저 찍어두고 시작하기


귀납적, 연역적인 탐구 방법이 있다. 귀납적 방법은 다 보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 연역적 방법은 결론을 먼저 찍어 놓고 하면서 비교해보는 것인데 나는 연역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직관이 어느정도 맞으면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속도도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가설이 있어야 피드백이 된다.

그래서 PM분들과 논의하기 전에 인스파이어드를 읽으며 내가 먼저 우리 회사를 비추어 보았다. 여러 아쉬움이 있었지만, 핵심을 추려보니 아래와 같았다. (상세한 책 내용 요약을 적을 수도 있지만, 필요한 경우 직접 읽으며 생각해보는 것이 100배 낫기 때문에 적지 않았다)

 

 

 

 

경영진의 빠진 고리

우리 경영진은 제품 비전과 전략이 없다. 제품 비전은 ‘좋은 말 좋은 말’하는 사명과는 다른 2~5년 후 구체적인 제품의 모습이다. 제품 전략은 그 모습을 그리기 위한 실천 단계다. 이렇게 말하면 경영진은 ‘있는데 왜 몰라? 이거 잖아’ 하시겠지만, 제품 비전은 구체적이면서 영감을 불러일으켜야하고 제품 전략은 초점을 넣어줘야한다는데 아무도 그런 것 못느낀다. 고객이 만족하지 않으면 수정해야지 …

제품 비전과 전략이 없으니 셀마다 구체적 사업 성과를 요청하지 못한다. ‘우리 0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너네 셀에서 전환율 00정도를 올려줘야해. 가능?’ 이렇게 말해줘야하는데 셀마다 받은 숫자는 월 매출 5억, 10억 이런게 전부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구체적 성과를 요구할 수 없는 경영진은 제품팀에 권한을 위임하지도 못한다. 어디서 들은대로 제품팀에 ‘우리는 수평조직이니 모든 권한을 줄게. 너네가 알아서해’라고 하기 쉬운데 목표가 아니라 솔루션을 위임해야한다. 명확한 것을 찍어주지 못하고 얼레벌레 수평적 조직의 겉모습만 따라하다보니, 물가에 내놓은 애보듯이 불안하게 지켜보다가 권한을 회수해버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리더십에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저자는 제품/기술/디자인 리더 개별의 역랑과 리더십은 물론이고, 이 세 명이 뭉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제품팀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회사에 제품 비전과 전략이 없거나, CEO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거나 하면 각각 생각하는게 아니라 세 명이 라운지에 나와 앉아서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는 모습이 직원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제품팀의 빠진 고리

일단 위와 같은 경영진의 병목이 잘 해결되면, 제품팀은 솔루션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가지 솔루션을 직접 검증, 실행할 수 있다.(각각 제품 발견, 제품 구현이라고 한다) 인스파이어드에서는 최고의 제품팀을 위한 1순위 조건이 제품 발견 능력이라고 한다. 우리 회사 제품팀은 주도적으로 솔루션을 내고 검증해본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제품 발견 프로세스에 대해 학습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제품팀은 기획>디자인>개발의 워터폴 프로세스에서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품 관리자들 사이에서 기획 역량 외에 ‘코칭’ 개념에 대해선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 각 셀이 프로덕트에 오너십을 갖고, 성장하며 일하기 위해서는 제품 관리자에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다.

 

 

즐거운 실패를 위한 조직적 회고 준비

마지막으로, 기준위에 피드백이 쌓여서 우리 회사만의 조직문화가 되려면 반드시 조직적 회고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제기되는 대부분의 문제는 순간의 불만으로, 개개인에 대한 책임과 비난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되는 순간 모든 일은 니일/내일로 나뉘고, 조직적인 반성과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라는 우아한 형제들 CTO분의 말씀을 인용했다)

 

 

좋은 내용이 있으면 뭘하나, 잘 전달되어야한다

위 내용들은 참 좋은 말이다. 좋은 말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잘 전달해서 실행되게 해야하는데, 이때 가장 나쁜 방법은 위 내용을 PPT로 대상자들을 모아놓고 발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변화할 것입니다!!” 

위 내용을 맘 속에 품은 채, 이제 경영진과 제품 관리자 키맨들을 한 명 한 명을 찾아가서 ‘네마와시’를 해보려고 한다. 여기까지 쓰면 이번 화는 많이 쓴 것 같다. 다음 화는 네마와시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경영진, 제품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네마와시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 대해 쓰려고 한다.

 

# ‘큰 그림을 가져도 작게 시작하면 좋다’는 것은 물론 한정된 에너지를 가진 경우에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엄청 뛰어나고 에너지가 충분한 사람은 뭐 그냥 확확~하면 되지 않을까 … 대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니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