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가 물속에 퍼져 나가듯 실행한다

 

 

일을 추진할 때 속도를 올리는 방법은 먼저 하나를 작게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요즘 애자일 방법론에서도 강조되는 일단 불완전한 것을 작게 하나 만들어 보고 수시로 피드백하면서 고치는 방법과 비슷한 개념이죠. 처음부터 크게 전체로 적용하기에는 리스크가 있고 안 할 수는 없기에 이런 시도가 이뤄집니다.

기획안은 가설을 시작으로 상세한 근거와 실행 계획으로 짜여 있습니다. 근사한 관리 문서죠. 문서 작성도 중요합니다. 근거가 팩트에 근거해서 명확하지 않으면 기획안 자체가 통과되지 못해 기획자는 조직 내에서 신뢰도 잃고 일도 추진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몇 백 장의 기획서를 써댔죠. 저도 몇 달간 몇 백 장의 보고서를 쓴 기억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일하는 직장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 만들어 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예전처럼 보고서만 몇 주에 걸쳐 힘들게 만들어 가면 그 새 뭘 했느냐는 반응이 나오는 게 바뀐 기업 문화입니다. 기획자의 기획안도 항상 적용할 부서를 먼저 생각해두고 커뮤니케이션을 해 가면서 기획안을 만드는 게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죠.

 

계획이 완벽해야 실행이 가능했던 시대


과거에 온라인 매출을 늘리기 위한 전략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입사하던 때만 해도 온라인에서 상품을 파는 것은 단순히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영업 채널에 불과했습니다. 온라인 시장이 크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 실감하기는 어려웠고 그렇다 해도 제한된 재고를 온라인 채널에 굳이 많이 넣을 필요를 못 느낄 만큼 오프라인에서 높은 매출 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온라인은 후 순위로 밀렸죠. 이런 분위기가 몇 년간 지속되자 시장에서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고객을 모으는 개척자와 추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과거 기획안을 리뷰해서 왜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파악했습니다. 제가 막 기획 팀장을 맡을 때였습니다.

과거 기획안을 보면 해가 거듭할수록 더 세부적인 계획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아젠다에 불과했던 온라인 매출 기획안이 아무 실체도 없는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가 전체 사업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다시 기획한 자료에서는 어떤 분야를 강화하고 구체적인 진입 방법까지도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몇 년 지나서 본 내용이지만 이대로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기획서도 이전에 이 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곳곳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 기획서마저도 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히스토리 파악을 해야 했습니다. 과거 기획안이 왜 실행될 수 없었는지 별다른 로그가 남아 있지 않아 당시에 일하던 사람 중 남아 있는 사람을 찾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사업 기획안의 후일담을 들어야 했습니다.

몇 명을 만나서 인터뷰한 결과 기획서 자체가 상부에 보고하기 위한 하나의 그림이었을 뿐 구체적인 준비 내용은 없었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재고를 따로 준비했다든지 온라인 매출을 발생시킬 플랫폼이나 채널 확보에 대한 협상 등 정말 실행할 조직과 자원이 없었다는 것이죠. 온라인 재고를 준비할 상품 준비도 관련 부서와 미팅하지 않았고 영업 조직을 작게라도 만들어서 온라인 매출을 전담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다른 아젠다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업부 전체가 거기 빠져 있었고 이런 내용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임에도 작게라도 한 번 시도해서 성공의 싹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죠.

반면 성공적인 기획안도 있었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가지고 하는 사업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테스트하기 위해 팝업 스토어를 열어 본 것이죠. 당시 작은 매장이었지만 고객의 반응을 보고 추가로 더 할지를 결정해서 하나의 콘텐츠로 잘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팝업 스토어에서 시도한 많은 캐릭터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몇 개에 불과했지만, 그 몇 개가 높은 매출을 창출했습니다.

 

 

Try, Try, Try


기획안을 만들면 하나의 조직에 적용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큰 영업 채널에 시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타깃 고객이 있는 너무 작지 않은 곳에서 혹은 팝업 스토어를 열어서 리스크는 적지만 제대로 테스트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작은 성공 모델을 만들면 그것이 왜 성공했는지 원인을 찾고 비슷한 컨디션을 가진 다른 상품, 채널에 확장해보면서 다시 2차 테스트를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1차와 2차 테스트의 주기는 짧아야 하고 시장에서 너무 많이 알려지기 전에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성공 모델은 기획자의 자산이자 기업의 자산이 됩니다. 그것 자체가 기업의 역량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많은 경영자나 기획자가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이런 성공 모델을 아무 데나 적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여러 형태의 매장들이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는 작은 매장부터 층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대형 매장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MD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백화점 입점 브랜드가 매장을 잡을 때 처음에는 떨어지는 브랜딩으로 가장자리의 큰 매장은 구하지 못해 사방이 통로인 작은 매장에서 출발해서 매출이 좀 나오면 가장자리의 큰 매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브랜딩을 강화하는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백화점을 가면 글로벌 브랜드치고 층 가장자리에 큰 매장으로 없는 브랜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큰 매장에서는 더 넓은 공간에 브랜드에 대해 보여줄 것도 많고 다양한 상품과 편의 공간도 별도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에서 브랜딩은 큰 매장이었습니다. 이것은 파는 콘텐츠와 입점한 브랜드들의 수익 구조와는 관계없이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모델이다’로 인식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단아들이 등장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작은 매장에 특이한 콘셉트로 고객을 불러 모으고 거기서 높은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 몇 년간 백화점 MD를 보면 과거에 층 가장자리에 넓은 면적으로 매장을 잡고 고객이 알아서 오라고 하던 브랜드 중에서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상대적으로 작은 매장으로 자리를 옮긴 유명 브랜드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예 백화점에서 공간을 리뉴얼하면서 과거의 매장 구성 프레임을 깨면서 이런 시도들을 도와주려는 노력들까지 하고 있습니다. 고객이 더 많이 오는 곳에서 더 싼 임대료로 더 특이한 시도를 통해 높은 매출을 올리겠다는 게 바뀐 모델의 핵심입니다. 과거에 매출이 나오기 시작하면 모두들 가장자리를 택한 것과 전혀 다른 모델입니다.

 

 

언젠가 그런 시도를 한 관리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왜 다른 입점 전략을 들고 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창의적인 발상이 있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굉장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당장 매출이 약한 상태에서 백화점에서 가장자리의 큰 매장을 줄 리가 없었고 대부분의 영업망이 백화점 등 높은 유통 수수료를 주는 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판매 관리비를 매장 때문에 쓸 수가 없는 상황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이왕 큰 매장을 못 얻을 바엔 의례적으로 거쳐가는 단계인 사방이 통로인 작은 매장을 주목받게 제대로 차별화시키고 거기 오는 사람들에 맞게 상대적으로 싸고 트렌디한 상품으로 진열했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백화점에 가면 과거와는 다르게 보세 의류 브랜드나 인터넷으로 출발한 코스메틱 브랜드가 주변 브랜드와 상당한 가격 차이를 보이면서 저가로 들어와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은 그런 브랜드가 한 둘이 아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백화점이 시장 보세 브랜드를 넣는 시기도 아니었기에 출발점에서 과거 모델을 뒤집었다는 게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물론 힘든 점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힘든 것이 내부의 반대였다고 합니다. 왜 매장을 더 크게 가장자리로 옮기지 않느냐고 매출이 더 올라간 다음에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내부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과거에 다들 그 방식으로 브랜딩을 했는데 왜 적용하지 않느냐며 사업 모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말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기획자였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말이죠.

 

 

기획자의 역할은 만능열쇠 만들기가 아니다


기획자로 실무 부서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작은 성공을 거두고 그것을 몇 배로 늘려 전체에 확장하면서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할 것은 모든 곳에 그 모델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곳에까지 범위를 넓혀 만능의 룰을 제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기업이 크고 하위 부서가 많은 조직의 기획자일수록 이런 유혹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획자 본인이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어디서 발견한 우수한 사업 모델을 저기에도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적용해서 성장하면 자신의 성과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획자가 개별 사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키워드를 앞세워 모든 것을 거기에 붙이는 순간 브랜딩을 획일화되고 사업 모델은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대기업에서 재미있는 콘텐츠 찾기가 어려운 것이죠.

정말 우수한 모델을 기획하면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물어보러 오고 비슷하게 시도해 보려는 제의가 회사 안 밖에서 나옵니다.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되죠. 다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고 시도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주변 조직들과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면 충분합니다.

너무 큰 계획으로 밤을 새우거나 너무 큰 기획안으로 밤을 새우고 또 실행을 하기 위해 밤을 새우면서 미리 지치는 기획자들이 아직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업에도 기획자 개인에도 무리가 되는 방법으로 일하지 말고 처음부터 함께 할 파트너를 정하고 실무와 기획이 함께 의견을 내 보면서 외부의 우수한 사례를 내부 환경에 맞게 적용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이 방법이 계속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지금 만들어져 있는 사업 모델이나 시스템을 보고 그것을 개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처음에 빅뱅으로 만든 모델, 그것이 팝업 스토어든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든 시스템이든 처음 의도를 돌아보고 사용자 피드백을 받아서 계속 버전을 올리는 방식으로 기획안을 추진하는 노력을 계속 부어준다면 처음에 조금 부족하게 시작한 서비스도 나중에는 점프 업 하게 됩니다. 크게 만들고 한 번 만들고 다음에 안 보는 기획안보다 이런 점진적인 개선이 나중에는 더 높은 성취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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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무실은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일까?
(1) 전략 기획자의 기업 역량 알기

 

PETER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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